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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의 산업혁신 톺아보기]


한국 경제 및 산업을 이끌어온 주체가 바로 현재의 대기업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토를 달지 않을 것이다. 대기업은 한국의 산업 근대화를 이끌었고 더 나아가 ‘한국’이라는 국명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런 대기업에게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대기업의 대외 경쟁력을 보여주는 수출의 경우 월간 수출 규모가 2018년 12월 이후 21개월 연속 전년 동기 대비 감소세를 유지하고 있다. 코로나19의 영향도 있겠지만 2년 내내 역성장이라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한국 경제의 상징이 무너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부진 추세가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이미 장기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실질적인 성장 기준인 물량으로 볼 때, 주요 산업 가운데 반도체를 제외한 철강, 디스플레이, 이동전화기, 자동차 산업이 2015년보다도 수출물량이 감소하여 마이너스 성장을 한 상태이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의 하락은 수출시장 점유율 1위 상품 수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가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품은 2000년 이후 60~70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같은 기간 중국의 점유율 1위 상품은 1351개에서 1735개로 증가했다.


이러한 부진은 대기업의 혁신성 하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업의 혁신활동을 평가할 수 있는 세계 최초 상품의 출시 동향을 보면, 2005~2007년 사이에 조사대상 대기업(종업원수 500명 이상) 중 42%가 세계 최초의 상품을 출시한 반면 2015~2017년에는 27%만이 세계 최초 상품을 출시하였다. 그렇다고 기존 제품에 대한 혁신에 주력한 것도 아니다. 2005~2007년 기존 제품에 혁신을 한 기업의 비중은 77%로 나타난 반면 2015~2017년 사이에는 48%의 기업만이 기존 제품에 혁신을 이루었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이러한 혁신성의 하락에 따른 대기업의 경쟁력 약화는 오래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비혁신 대기업의 장수는 국민경제의 짐으로 돌아온다

우리나라 대기업은 2017년 기준으로 평균 업력이 19년이고 20년 이상의 기업 비중도 37% 수준이다. 경쟁력 하락이 나타난 지난 10년간 1200여개의 대기업(종업원 300인 이상 제조업) 중 파산한 기업수도 42개에 불과하다. 미국의 대기업 상위 500개사 중 과반수가 15년 이내에 사라지는 것에 비교하면 장수하는 편이다.

글로벌 경쟁력은 하락하는데 안정적 경영지표를 유지하는 우리나라 대기업의 마법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혁신성을 상실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이 낮아진 대기업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국내 시장을 통한 수익성 확보일 것이다. 국내 시장에서 가지고 있는 권력을 활용하여 시장가치를 넘어선 이익을 얻는 지대추구(Rent Seeking) 행위가 이루어진 것이다. 대기업의 시장규율 위반행위는 이미 너무 많이 알려져 있다.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등 부당내부거래를 통한 사익편취, 불공정 하도급 거래를 통한 수익 확대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문제는 이러한 지대추구적 행위가 결국 자신의 경쟁력을 더 하락시키고 나머지 국민경제 참여자의 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대기업의 부당내부거래는 시장 내 경쟁력 있는 기업의 성장을 제약하고, 하도급 기업에 대한 단가인하 요구 등은 하청기업의 수익성을 제약하여 ‘중소기업의 좀비화’ 길을 열어주게 된다. 결국 경쟁력을 상실한 대기업으로부터 시작된 좀비기업 다단계 구조가 산업생태계의 혁신체계를 좀 먹게 되는 것이다.

하이에나가 된 대기업을 정글의 표범으로 다시 만들기

대기업의 지대추구 행위는 시장의 경쟁적 상황에서 승리하여 독점적 지위에 오른 기업의 당연한 행위일 것이다. 어떤 이는 혁신의 궁극의 목적이 지대추구에 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럼 어떻게 쉬운 길을 찾아가려는 기업을 혁신의 가시밭길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

첫째는 편한 길을 없애는 것이다. 경제질서를 파괴하는 지대추구 행위에 대하여 정확한 대가를 치르게 하여 대기업이 편법적 행위를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공정거래에 관련된 법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법률들이 제대로 집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011년부터 2017년까지 80여건의 공정거래법 위반 사건에 대해 모두 ‘경고’ 처분에 그쳤고, 2018년에 발생한 담합사건 중 고발률은 13%에 불과했다. “깨진 창문을 방치하면 집이 불탄다”라는 말이 있다. 작은 잘못이라도 방치하면 범죄의 수준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대기업에게 아무리 작은 잘못이라도 적발되고 처벌된다는 것이 각인되어야 쉬운 길에 대한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가시밭길을 걸을 수 있는 장화를 마련해 주고 고난의 행군에 동행자가 되어주는 것이다. 흔히 기업의 투자결정은 기대수익률에 의존하므로 투자 활성화를 위해 감세 및 금리 인하 등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불확실성이 높아 미래 수익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러한 정책은 무의미하다. 특히,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신산업 투자의 경우에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더 큰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국내 기업의 경우 60%가 신산업 투자의 장애요인으로 시장의 불확실성을 들고, 투자규모가 상대적으로 큰 대기업이 불확실성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대기업의 신산업 투자 활성화 정책은 불확실성 축소이다. 정부 정책의 불확실성부터 줄이는 것이 시작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녹색성장, 창조경제, 혁신성장 등의 이름으로 산업정책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중점을 두는 산업이 변경되었고 이에 따라 기업들은 정부정책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정책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면 정부 지원으로 아무리 투자에 유리한 조건이 조성되더라도 기업이 투자를 결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기업의 투자를 독려하기 위해 감세와 저금리 정책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만든 정책 불확실성 때문에 투자가 크게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정권이 바뀌더라도 정책의 연속성을 담보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방안으로 산업혁신 정책을 추진하는 독립적 기구의 설립도 고민해 볼 수 있다.

정부의 일관된 정책으로 모든 시장의 불확실성이 해소될 수는 없다.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없다면 정부가 투자자로 참여하여 불확실성에 따른 위험을 같이 공유하여 사업을 독려해야 한다. 장기간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고 사업성패의 불확실성이 높은 사업의 추진은 확실한 수익이 보장되어 있는 대기업에게 큰 매력이 없다. 불확실성에 따른 위험이 높은 사업에 정부가 공동의 투자자로 참여하면 기업은 정부의 사업추진 의지도 확인하고 투자손실에 대한 부담도 적게 느끼게 된다. 결국 기업의 입장에서 투자의 매력도는 높아지고 손실의 부담은 낮아져 사업진출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기업 역량 활용도에 우리 산업의 미래가 달려있다

4차 산업혁명, 코로나19, 미·중간 무역분쟁 등으로 세계 산업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지각변동은 기존 질서체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우리나라 산업의 미래 역시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대기업은 한국 경제 역량의 핵심체이다. 이들의 역량을 활용하지 않고 새로운 글로벌 산업 환경을 뚫고 나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정부는 대기업이 지대추구 전략에서 벗어나 혁신의 동력으로 나설 수 있게 길을 닦아주며 그들의 역량이 긍정적으로 사회화될 수 있도록 유도하여야 한다.

대기업은 우리 경제의 거인이다. 거인의 팔을 비트는 방식으로 그들이 가는 길을 바꿀 수 없다. 그들 자신이 스스로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그들의 행동방정식을 이해하고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솔로몬의 또 다른 지혜일 것이다.

이재우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산업경제팀장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heri_review/9663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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