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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학현학술상 수상자/이근 서울대 석좌교수

‘중진국 함정’극복에 균형-불균형 두 유형 규명
한국, IT 함께 바이오·소부장 등 신사업 육성해야

“학현학술상이 확대 개편된 뒤 첫 수상식인데, 변형윤 선생님이 직접 보지 못하셔서 너무 아쉽습니다.”


제13회 학현학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근 서울대 경제학부 석좌교수는 지난달 27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연구실에서 <한겨레>와 만나 수상소감을 밝혔다. ​ 학현학술상은 한국 경제학계의 거목인 학현 변형윤 선생(전 서울대 명예교수)의 삶과 정신을 기리고 한국의 경제학 연구를 촉진하기 위해 2011년 제정됐다. 이 교수의 스승인 학현 변형윤 선생은 지난해 12월25일 95살을 일기로 별세했다.

이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부 시절 학현 선생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없었다. 학현 선생이 1980년 대학 민주화 선언 등을 주도하다가 전두환 군사정권으로부터 강제해직을 당했기 때문이다. 학현 선생이 해직 시절 후학들과의 경제민주화 연구를 위해 학현연구실(서울사회경제연구소의 전신)을 설립하자, 대학원생 신분으로 월례토론회에 열심히 참여했다. 이 교수는 “미국에서 유학(버클리대)을 하다가 6월항쟁의 열기가 뜨겁던 1987년 일시 귀국해 결혼식을 올렸는데, 변 선생님이 주례를 서주셨다”고 스승과의 각별한 인연을 회고했다.

이근 교수가 지난 30년간 씨름해온 연구주제는 후발신흥국의 경제발전, 즉 ‘추격과 추월’ 전략이다. 그는 ‘추격론’에서 독보적인 연구성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가 쓴 논문들의 최근 5년간 피인용 지수는 국내 경제학자 가운데 가장 높다. 추격론은 한국이 20세기 후반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음하는데 성공한 드문 사례라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관심이 높다.

기술추격론은 슘페터학파의 핵심 개념인 국가혁신체제에 기반한다. 신고전학파의 경제성장이론은 자본과 노동 투입을 중시하고, 기술과 혁신은 설명할 수 없는 외생변수로 취급했다. 반면 독일계 경제학자인 조지프 슘페터는 혁신활동을 장기적 경제성장의 근원으로 보았다. 새로운 기술을 창출·흡수·개량·확산하기 위한 활동과 상호작용을 수행하는 개인·기업·공공조직 간의 네트워크로 정의되는 국가혁신체제는 국가혁신정책의 수립에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혁신체제를 수량적인 지표를 통해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게 과제였다.

이 교수는 미국 특허와 특허 인용 통계를 이용해서 혁신체제를 국가·산업·기업·지역 등 다양한 차원에서 측정하고 계량적으로 분석·설명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일 예로 기술수명(사이클) 지표를 활용해서 한국·대만·중국이 정보기술(IT) 산업을 중심으로 선진국 추격에 성공한 것을 계량적으로 보여줬다. 이 석좌교수는 “오래된 특허가 많이 인용될수록 기술수명이 긴 산업이고, 반대로 새로운 특허가 많이 인용될수록 기술수명이 짧은 산업”이라면서 “정보기술처럼 기술수명이 짧은 분야는 선진국이 장악한 기존 기술도 금방 낡은 것이 되는 특성이 있어, 한국과 같은 후발국으로서는 그만큼 진입장벽이 낮아 추격에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또 후발국형 혁신체제가 선진국형 혁신체제로 이행 발전해 갈 수 있는 경로를 밝힘으로써 혁신과 후발국 경제성장에 관해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세편의 심사대상 저작물 가운데 첫 번째인 ‘다양한 국가혁신시스템과 중진국 이후의 성장을 위한 대안적 경로’는 2021년 경제발전 분야의 최고학술지로 꼽히는 ‘세계 발전’(World Development)에 수록된 논문으로 그의 연구성과를 잘 보여준다.

이 교수는 특허 통계를 활용해 지식의 토착화, 기술다각화, 기술수명, 독창성, 분권화 등 5개 상세지표를 기반으로 32개국의 국가혁신체제를 5개 유형으로 나누었다. 이어 ‘중진국 함정’에 빠진 유형과 대비되는 성공적 추격 유형에 주목해서, 한국·대만·중국처럼 5가지 지표가 상대적으로 고르지 않은 ‘불균형적 혁신체계’와 스페인·아일랜드·인도·러시아처럼 5가지 지표가 상대적으로 고른 ‘균형적 혁신체제’라는 상이한 두가지 유형이 존재함을 규명했다.

이 교수는 “한국·대만·중국은 정보통신 등 수명이 짧은 기술을 중심으로 혁신체제를 발전시켜 발전에 성공한 반면 인도 등은 기술수명이 짧은 정보통신은 물론 수명이 긴 제약 등에서도 강점을 보이고, 기술의 다양화와 분권화도 일정 수준에 올라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후발신흥국 또는 중진국이 선진국을 추격하기 위한 경로가 다양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두 번째 저작인 ‘중국의 기술적 도약과 경제적 따라잡기: 슘페터주의적 관점’은 영국 옥스퍼드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저서이다. 이 책은 미·중 갈등 상황에서 중국경제와 산업의 미래를 동아시아 발전모델의 관점에서 진단하고 전망한다. 이 교수는 “중국은 중진국 함정과 ‘투키디데스 함정’(기존 강대국과 신흥 강대국 사이의 패권 교체는 전쟁을 포함한 직접적인 충돌을 수반한다는 이론)에 빠지지 않아야 하는 단기 도전과제에 직면해 있을 뿐아니라, 경제적 성과를 중산층 창출 및 민주화의 물질적 기반으로 연결시켜서 ‘민주화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장기 과제”라면서 “민주화가 중진국 함정의 극복을 보장해주지는 못하지만, 선진국 중 민주주의를 안하는 나라는 없다”고 강조했다.

세 번째 논문인 ‘동아시아 두 산업지구의 혁신체계 발전: 주변 시스템으로부터의 전환 및 업그레이드와 핵심기업인 삼성 및 티에스엠씨(TSMC)의 역할’은 삼성이 위치한 한국의 수원과 티에스엠씨가 위치한 대만의 신쭈를 지역혁신체제 관점에서 비교 분석했다. 논문은 선도기업과 지역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두 지역 모두 해외지식에 의존하던 주변부·미성숙 혁신체제에서 토착화·다각화에 성공한 추격형 혁신체제로 진화했음을 규명했다.

한국은 수명이 짧은 기술, 단품 기술 등에 기반한 정보통신(IT)과 같은 산업에 특화하여 중진국 함정을 넘어서 선진국 그룹에 합류하는데 성공했다. 한국이 경제발전을 지속하려면 추격형 경제에서 선도형 경제로 신속히 이행해야 한다. 이 교수는 “앞으로는 기존 정보통신 기술뿐만 아니라 수명이 긴 기술, 융복합 기술 등에 기반한 바이오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같은 산업구조를 갖추어야 중국과 같은 후발국의 추격에서 벗어나고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버클리)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부터 서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이 석좌교수는 국제슘페터학회 회장, 한국국제경제학회의 회장 등을 역임했고 문재인 정부에서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을 맡아 정책자문에도 참여했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jskwak@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109033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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