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의 눈    시민경제 • 민생 이슈 현장 전문가 칼럼

[HERI의 눈]
‘전자산업 메카’ 명성 사라진 구미의 현실
과거 매달리다 정책 대전환 실패한 증거
산업이 수요 변화 따르는 게 ‘구조 고도화’ 
사업서비스도 산업정책의 대상 삼아야

지난 2016년 10월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구미산업단지에 자리잡은 한 입주 업체를 방문회 회사 관계자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 2016년 10월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구미산업단지에 자리잡은 한 입주 업체를 방문회 회사 관계자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1861년 전 경북의 어느 해안가에서 연오랑과 세오녀가 차례로 신라를 떠났다. 서기 157년, 신라 8대 아달라왕 4년의 일이라고 일연은 콕 짚었다. 연대를 특정하는 건 <삼국유사>에서 드문 일이라 하니 특별한 이야기로 여겼다는 뜻이다.

8대 아달라왕의 성은 박씨, 9대 벌휴왕은 석씨다. 아달라왕의 부인 내례가 이매라는 사람과 통정했는데, 아달라왕이 내례 부인은 그냥 두고 이매를 죽였다. 내례 부인이 6대 지마왕의 딸이자 8촌간이라는 사정 탓도 있었을 것이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신라를 떠난 후 20여 년이 지나 아달라왕은 죽었다. 그가 죽기 전 10년간 기록이 전혀 없는 건 정치적 혼란기였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벌휴왕은 놀랍게도 아달라왕에게 죽임을 당한 이매의 아버지니 늙은 나이였다. 이어 10대 내해왕은 이매와 내례 부인 사이의 아들이라 추정된다. 이 굉장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박씨 왕조 로열 패밀리인 내례 부인이 석씨 남자를 연인으로 두었고, 연인이 남편에게 죽음을 당한 이후 10여년 간 복수의 정변을 벌인 셈이다. 죽은 연인의 아버지와 아들을 연이어 왕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고대 신라의 왕좌의 게임이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신라를 떠난 후, 왕계가 박씨에서 석씨로 넘어가는 고비는 짧은 로맨스와 긴 권력투쟁의 범벅이었다.

연오랑 세오녀가 신라를 떠난 지 1811년 만인 1968년, 같은 바닷가에 포항제철소가 세워졌다. 그 남쪽 울산에는 석유화학단지가, 북쪽 구미에는 국가전자공업단지가 세워져 한국의 산업화를 이끌었다. 이 지역은 20세기 후반 한국 정치권력의 뿌리였다. 우연히도 구미 선산 지역 출신의 박씨 성이 최근까지 권력을 대표했다. 연오랑 세오녀는 명백히 철기 집단을 상징한다. 연오랑은 철 생산, 세오녀는 철 가공기술의 상징임은 이름에서 유추된다. 이들이 고대 경북지방을 떠나간 이후, 경제적 기반을 상실한 아달라왕의 정치적 기반은 허약해졌을 것이다. 아달라왕이 귀환을 간청했으나, 세오녀는 다만 철기제작 기술을 적어 보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마치 오늘날 기업의 ‘리쇼어링(re-shoring, 해외투자기업의 국내 귀환)’을 애타게 촉진하는 정책이 무망한 것과 같다. 신라의 박씨 왕계는 아달라왕으로 실질적인 종언을 맞이했다. 구미-포항-울산을 잇는 공업벨트의 암울한 미래를 보면서 무엇을 상상해야 옳은 것일까.

구미는 한국의 전자산업 메카이다. 다만 그 명성은 과거의 것이다. 삼성전자는 중국과 베트남으로, 엘지(LG)전자는 파주로 설비를 이전했다. 구미시의 신산업 유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입주를 희망하는 기업은 거의 없다. 대기업이 떠나고 남은 부지는 기획부동산에 의해 쪼개져 영세기업에 불법 판매된다. 2010년 이후, 공단의 업체수가 대폭 늘어난 것은 입주기업의 영세화 이외에는 설명이 어렵다. 오랜만에 들렀던 구미에서 국가단지로서의 면모를 찾기는 힘들었다. 낮이고 밤이고 인적이 줄었고, 시내 원룸을 채우던 동남아 인력들마저 일자리가 없어 떠나는 바람에 공실률이 늘었다 한다. 구미에서 만난 기업인들의 표정은 오히려 심드렁했다. 대기업을 따라 해외 동반이전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 뿐이었다. 기회만 있다면 부동산 가격 상승의 여지가 있는 평택 이북으로 공장을 옮기고 싶어 했다.

‘내수 확대’만으론 부족, 산업구조 변화 뒤따라야

구미공업단지에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다시 읽게 된다. 고대의 신라나 최근의 구미에서도 산업의 쇠락이 정치적 변혁의 배경으로 작용하지 않았겠는가. 영남권 공업벨트 모습은 한국 경제의 단면도이기도 하다. 산업구조 고도화가 멈춘 사이에 경쟁국은 계속 등장하고 있다. 한국의 글로벌 기업에 의해 경쟁국이 성장하기도 한다. 사실 한국이 제조업 육성에 성공했다면 다른 나라에서도 불가능할 이유가 있겠는가. 전자제품을 만드는 산업이 첨단이 아닌 마당에, 세계시장의 제품 사이클이 한국만 비켜 가리라 믿을 근거는 없다. 철강이든 조선이든 예외가 아님은 우리 스스로가 증명했고다. 영민한 한국의 글로벌 기업들이 이를 모를 리가 없다. 2010~2016년 사이 한국의 수출이 30% 늘었지만 국내 산업생산은 10% 성장에 그쳤다. 우리 수출 속에 다른 나라의 부가가치 비율이 증가한다는 얘기다. 한국의 글로벌 기업들이 생존을 위해 바다를 건너가거나, 바다 건너 만든 물건을 수출에 투입한 결과다.

그래서 고용과 소득에 대한 수출의 기여는 감소했다. 내수 중심으로 정책을 전환할 필요성을 대부분 인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쉽게도 내수 확대 정책이 국내 산업구조의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는 인식은 부족하다. 그동안의 내수 진작 정책들이 단발성으로 끝나버린 근본원인이다. 소득이 2만달러, 3만달러로 오르면 당연히 시장수요는 공산품에서 서비스로 이동한다. 그 수요에 산업이 반응하는 것이 구조 고도화 과정이다. 선진국에서 사업서비스와 사회서비스 비중이 한국보다 훨씬 높은 이유이다. 늘 쓰던 공산품에 인공지능을 넣는다고 곧장 혁신은 아니다. 소득의 증가가 폭발적으로 창출하는 수요를 외면한 채 경제의 질적 구조적 고도화를 기대할 순 없다. 사업서비스 분야는 규제개혁을 기초로 시장에 맡겨 두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시장실패가 극심한 사회서비스 부문은 산업정책으로 적극 개입하는 것이 옳다. 과거 우리는 국민의 희생을 기초로 자동차와 티브이(TV)를 만드는 데 정책 지원을 당연히 실시했다.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선진국 자리에 올라섰다는 지금, 국민의 수요가 넘치는 사회서비스를 산업정책의 대상으로 삼지 않아야 할 이유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정부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으로 이를 부분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정책과 자원의 재배분이 과감하지 못하고 후퇴의 우려마저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수년째 한국을 전반적으로 행복하지 않은 사회로 보고하고 있다. 시민의 행복과 직결되는 다양한 서비스를 공급하지 못하는 것이 큰 원인이다. 그럼에도 산업정책의 대전환이 어려워 보이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한국 경제를 키운 산업들이 바다를 건너가는 대신 새로운 수요는 넘쳐나지만, 자긍심에 넘치는 산업화 세대는 여전히 일선에 있고 변화를 거부한다. ‘유전적 기억(memes)’으로서 산업화의 추억은 강력할 뿐만 아니라 세대를 넘어 정책 집행의 ‘과정’을 무의식적으로 지배한다. 그리하여 올바른 정책들도 집행 과정에서 종종 소멸된다. 과정을 지배하지 못한 정책의 무위함을 경험하고도 진지하게 배우지 못한 것은 아닌가 걱정이다.

구미의 택시 기사는 금오산이 왕 셋을 배출할 기운이라 말하면서 외지인 승객의 눈치를 보았다. 지난해의 일이다. 곳간이 쪼그라지는 왕국을 견디지 못해 새로운 왕계가 선출돼 그 셋을 채울 것이라고 그가 예상했을 턱이 없다.


한홍열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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