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의 눈]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 사단법인 ‘씨즈’ 공동 주관
제1차 시민경제포럼 ‘지역 시민사회와 재난 복구’
고베와 안산, 경주…‘재난 이후의 삶’을 말하다
고베 지진 20주년 프로젝트 ‘BE KOBE’
20년간 고베 지켜온 시민 75명 인터뷰집
‘일상 살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사회에 공헌한 것’이라는 관점 돋보여
고베시 나다구 출신 우쓰미 겐이치
우리 마을 좋은 점 알리는 ‘장난’ 시작
마라톤 열고 재건 이후 마을상상도 그려
“재건 과정 지친 주민들에 꼭 필요한 활동”
재난 겪은 안산·경주도 ‘닮은꼴’ 활동
단원소생길·합창단 외에 ‘온유의 뜰’ 조성
경주에선 트라우마 심리상담 치료 등
‘커뮤니티 재난 회복력’의 좋은 선례될 것
‘즐거운 일을 한다’ ‘무리하지 않는다’…
‘탈정치’ 방식 한국에 낯설기는 하지만
사회적인 세계의 지속가능성 위해선
‘우쓰마 겐이치 방식’ 진지한 고민 필요
쿠마모토에 짧게 들어갔다 나온 후 오히려 오래된 재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토록 불안해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마을과 자신의 삶을 되살려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에, 동북대지진은 여전히 진행 중인, 너무 가까운 참사였다. 그래서 고베에 관한 자료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고베 대지진은 1997년 일본 고베시를 중심으로 일어난 지진으로, 동북대지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전후 일본 최악의 지진으로 알려졌다.(고베 지진은 ‘효고현 남부 지진' 또는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도 알려졌으며, 1995년 1월17일 화요일 오전 5시46분경 일어났다. 6400여 명이 사망했고 부상자만 4만3000여 명에 이른다.)
‘BE KOBE'는 고베 대지진 20주년을 맞아 고베시에서 시작한 프로젝트의 이름이다. 고베시는 커다란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모았던 고베 시민의 공헌을 기억하려 고베항에 ‘BE KOBE'라고 쓴 커다란 기념물을 만들고 재난을 기억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고베시는 ‘BE KOBE'가 “다른 사람을 위해 힘을 다한다는 의지를 다지고, 그 마음으로 20년간 고베를 지켜온 고베 시민임을 자랑스러워하라”는 뜻이라고 밝혔다. 슬로건이 밝히고 있듯이, 그 중심에는 시민이 있다.
책 발간 또한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고베 마을 활동가 우쓰미 겐이치는 그중에서도 ‘꼭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었다. 여러모로 신선했다. 대학 시절부터 시민단체에서 활동했지만 ‘대의'와 ‘가치'란 말에 조금씩 지쳐 ‘내 삶에도 지속가능하고 사회에도 조금은 좋은 일'을 꿈꾸기 시작한 내게, 그의 이야기 속엔 눈이 번쩍 뜨이는 대목이 많았다.
4. 고베와 안산, 경주를 잇다
이번 포럼은 ‘대지진을 겪은 고베와 세월호 참사를 겪은 안산, 지진 재난을 겪은 경주를 이어보는 것은 어떨까?'라는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세월호 참사는 너무나 참담한 인재(人災)였다. 경주 지진은 고베 대지진만큼의 피해를 준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 사회엔 큰 재난이었다. 양상과 규모는 다르지만 세 곳 모두 지역사회를 뿌리째 흔들어놓은 큰 재난이었다. 서로 다른 상황을 억지로 한데 엮어내는 건 아닌지 두려움이 앞섰으나, ‘재난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관점에서 바라보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들어보니, 재난 이후의 안산과 경주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다. 재난 이후 고베와 안산, 경주의 ‘삶을 위한 활동'은 서로 닮아 있었다. 포럼 당일 안산 힐링센터0416쉼과힘 임남희 사무국장, 경주아이쿱생협 정미정 이사장은 서로의 활동에 깊은 공감을 표했다. 세월호의 아픔을 극복하고, 안전한 사회에서 생명들이 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단원소생길'을 조성했다는 임남희 사무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안산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에요. 고잔동은 정말 아름다운 동네여서 한 번 이사 오면 다들 떠나기 싫어하는 곳입니다. 그걸 살려보려 했죠.”
단원소생길과 같은 취지로 유가족 합창단을 조직하고, 뜨개 공방을 열고, 세월호 희생 학생 양온유 양의 이름을 딴 ‘온유의 뜰'도 조성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은 유가족과 안산 주민들 사이에 만남의 장(場)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정부 지원 거의 없이 양온유 양이 다니던 교회 장소를 빌려 시작한 일이다. 점차 그 활동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올해 경기도로부터 2억 원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경주아이쿱생협은 지진 이후, 재난 상황에 기여하고자 하는 심리상담사들의 모임 ‘이지스', 국제개발 NGO ‘더프라미스'와 함께 재난 후 트라우마 치료 뿐 아니라 지진 발생 시 대처 방안도 학습했다. 조합원 대부분이 안전에 관심이 많은 어머니들이어서 호응이 컸다. 일본 도쿄도에서 발간한 <도쿄방재>를 번역해 지역 주민들과 나누기도 했다. 포항 지진이 발생했을 땐 교육을 받은 조합원들이 포항으로 달려가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아직 우리 사회의 재난 담론은 그 지층이 깊지 않은 까닭에, 법·제도를 정비하기에도 벅찬 수준이다. 법·제도가 위로부터 만들어진다면, 그렇게 정비된 제도가 현장에 뿌리내리도록 이끌고 제도가 다 할 수 없는 마음의 영역을 살피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마을과 사람의 일로 남는다. 유엔도 재난의 핵심 대응 주체로서 커뮤니티에 집중하고 있으며, 커뮤니티 회복력(resilience)을 강조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커뮤니티 재난 회복력'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는 않다. 하지만 실제 재난을 겪은 지역에서는 마을이 치유의 뿌리를 단단히 다지고 있었다.
경주아이쿱생협이 재난대응 역량강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경주아이쿱생협
5. 재난을 목격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포럼을 기획하면서 스스로 던진 질문은 ‘재난을 목격하고, 참여하기로 결정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고베, 한국의 안산과 경주, 세 곳의 사례를 통해 재난을 겪은 지역사회에 성공적으로 개입하기 위한 몇 가지 원칙을 꼽아보았다.
(1) 마을의 신뢰를 얻는 방법은 ‘그 자리에 있는 것'뿐이다
우쓰미 켄이치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살펴보고, 직접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전에 몇 가지 답을 얻기도 했다. 우쓰미 겐이치의 마을 활동은 일본 내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그는 TV에 출연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강연을 다니기도 한다. 아래는 한 강연회에서 있었던 젊은 활동가와의 질의응답 내용이다.
?마을 활동이 어려워 고민이 많다. 뭘 하려고 해도 주민들이 ‘이상한 사람'으로 대하는 시선이 있는데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마을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무엇인가?
“비결은 ‘버티기'다. 나도 그랬다. 마을 사람들이 초기에는 ‘또 누가 와서 이상한 짓 하는 거 아냐?' 하는 의심의 눈길로 볼 수 있지만, 그 자리를 꾸준히 지키면서 작은 일이라도 해나가면 사람들이 다시 보게 된다. 그게 쌓이면 이상한 놈들이 ‘썩 괜찮은 놈들'로 바뀌는 시기가 온다. 그 시기가 되면, 내용도 보지 않고 ‘이상한 거 아냐?' 하던 사람들이 ‘쟤들이 하면 괜찮아', ‘좋은 친구들이니까 쟤들이 하는 일은 도와줘야지' 하게 된다. 사람을 보고 모인다. 그 자리를 끈질기게 지키는 것밖에 비법이 없다.”
무대가 어디든 마을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다. 좋은 마음으로, 마을에 도움이 되기 위해 활동하려는데 마을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는다, 자신들을 위한 일인데도 공동체는 생각하지 않고 개인의 이득만 따진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나 재난 피해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누구를 믿고 함부로 손을 잡겠는가?
우쓰미 겐이치가 지역 출신이면서도 개인으로 활동한 탓에 ‘버티기' 작전으로 마을의 신뢰를 얻었다면, 안산과 경주는 이전부터 마을에서 활동해왔던 신뢰받는 조직과 성공적으로 결합한 사례다. 안산의 힐링센터0416쉼과힘은 세월호 참사 희생 학생의 부모가 소속되어 있었으며,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는 교회와 손을 잡았다. 경주아이쿱생협은 조합원들과의 관계망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기존에 쌓인 신뢰 관계를 십분 활용했다.
(2)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
우쓰미 겐이치가 보여준 재난 이후 시내버스에서의 게릴라 음악 공연이나 림보 대회 같은 ‘장난', 세월호 유가족 합창단 조직 등은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일 수 있다. 가족과 이웃이 떠난 마을에서 즐거운 활동을 하고, 노래와 춤을 춘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 모두 ‘재난 피해자는 어때야 한다'는 외부의 시선에서 벗어나 실제 피해가족과 이웃들이 원하는 것을 실천했다.
힐링센터0416쉼과힘의 임남희 사무국장은 포럼에서 “세월호 유가족을 만날 때마다 ‘미안하다'고 말하거나 손잡고 우는 것만으로는 관계를 지속하기 힘들다. 서로가 또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만날 매개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한편, 마음껏 소리칠 장소가 필요했던 유가족들의 막힌 가슴을 조금이나마 풀기에 합창단이라는 형식은 안성맞춤이었다. 경주아이쿱생협의 재난 대응 교육에는 조합원의 요청으로 지진 대피뿐 아니라 인접한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했을 경우에 대비한 교육도 포함되어 큰 호응을 얻었다. 세 경우 모두 개입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목소리에 충분히 귀 기울였다.
(3) 활동을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사람이 한다
때로 많은 사람들을 조직하거나 더 많은 돈을 끌어와 활동의 규모만 비대해지는 경우가 있다. 논의된 세 가지 사례 모두 조직의 비대화보다 활동 자체에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아예 조직이 없거나(고베), 소규모 조직이 다른 관계 기관과 협력하여 활동하거나(안산), 기존 조직을 그대로 활용했다(경주).
경주의 경우, 가족들의 안전에 민감한 생협의 어머니 조합원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는데, ‘내 가족의 안전을 스스로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참여했기에 활동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힐링센터0416쉼과힘의 경우에는 연세대 상담코칭지원센터, 선부종합사회복지관 등과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상근 활동가 3명의 작은 조직이 꾸준히 활동할 수 있었다. 고베의 우쓰미 겐이치는 앞서 말한 것처럼 재미있는 활동을 발굴하고, 참여는 철저한 자율에 맡겼다.
6. 한국에서 ‘우쓰미 겐이치 방식’은 가능할까
우쓰미 겐이치의 활동이 많은 관심을 받은 것은 그의 독특한 철학은 물론, 그러한 활동을 통해 마을 활동가로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날 포럼에서는 “고베 지역의 생협들도 재난 복구에 역할을 한 것으로 아는데, 혹시 힘을 모아 활동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하지만 그는 “동네에서 재미있게 노는 것이 목적이고, 제도나 정부의 변화를 요구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큰 단체와 협력은 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내가 나와 이웃을 돕고 행복하게 지내겠다'는 것은 일본의 다양한 마을 만들기, 시골에서 살아가기의 성공 사례에서 거듭 확인되는 계기 중 하나다. 많은 성공 사례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국내에 소개되었지만 국내 시민단체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바로 활동을 정치화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정치 세력화를 통해 의제를 만들고 제도 변화를 촉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온 한국 시민·사회운동에서 이러한 ‘탈정치'는 받아들이기 쉬운 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충분히 생각해볼 지점은 있다. 특히 시민사회나 사회적경제 영역의 젊은 활동가 이탈이 눈에 띄는 요즘, ‘사회적인 세계'의 지속가능성을 생각해볼 때 우쓰미 켄이치의 방식은 중요하다.
‘즐거운 일을 한다' ‘무리하지 않는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다. 다시 하고 싶어지면 그때 다시 함께하면 된다'…. 어느 것 하나 우리의 시민사회에서는 쉽게 가능해 보이지 않는 일이다. 그가 전업 활동가가 아니고 별도의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과 책임감이 미덕인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자세를 갖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앞선 질문을 다시 풀어볼 수 있다. 전업 활동가는 왜 이렇게 활동하면 안 될까? 전업 활동가가 ‘즐거운 일을 자유롭게 열고' ‘무리하지 않아도 되고' ‘오고 싶을 때 오는' 자유로운 플랫폼에서 시민을 만날 수는 없을까? 민관 협치나 마을 만들기 현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반 시민을 만나기 어렵다'는 말이 종종 들린다. 새로운 판을 벌여도 이미 정치화된 사람들이나(이 사람들이 소중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혹은 ‘판이 열리는 시간대'에 참여 가능한 사람들만 계속 온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얘기다.
서울은 더욱 심하다. 치솟는 집값에 떠밀려 몇 년에 한 번씩 이사를 해야 하는 사회에서 ‘내 마을'에 애정을 갖기란 어려운 일이다. 정주성이 없는 마을 안에서 거주민들 간의 협동은, 철저히 개인이 필요한 만큼 익명성을 과도하게 침해하지 않는 영역에서만 받아들여지기 쉽다. 물론, 공동육아나 교육 등 다른 분야의 공동체 만들기라면 당사자들의 참여가 좀 더 긴밀하게 이뤄질 수 있겠지만, 누구 하나 대상이 아닐 수 없는 재난이 주제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시민사회에 전혀 참여하고 싶지 않은 사람까지 보호받을 수 있는 가장 느슨하고 헐거우면서도 촘촘한 보호막이 필요하다.
7. 다양한 상상들
그래서 무엇이 필요할까? 고베와 안산, 경주를 이어보며 떠오르는 상상들을 나열해본다. 우쓰미 겐이치의 조언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자유롭게….
(1) 유연한 활동 방식들
활동가들이 프로젝트와 예산, 시민사회 내의 위계질서에 사로잡히면 유연한 활동이 불가능하고, 무리하면 오래 버틸 수도 없다. 예산을 딸 수 있는 사업, 선배 활동가가 ‘오케이' 할 것 같은 사업에만 묶여서는 안 된다. 또, 모두가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기계적으로만 활동해서는 시민들을 폭넓게 만날 수 없다. 시민사회에도 파격적인 활동방식의 제고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직업 활동가 안에서도 우쓰미 겐이치와 같이 자유로운 활동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활동가가 스스로 출퇴근 시간을 조정해서 원하는 분야의 시민들을 자연스레 끌어들일 수 있는 장을 열어보고, 새로운 실험을 하도록 하는 식이다. 활동가가 사회 혁신을 이끄는 개인 플랫폼으로 성장할 판을 열자는 것이다.
특히 최근 젊은 활동가들의 이탈 현상이 두드러진 현실을 심각하게 생각한다면, 조직 분위기 혁신은 꼭 필요하다. 즐겁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예산안의 1원, 10원 단위를 맞추기 위해 만나는 사람보다 영수증을 챙기는 일이 더 중요하고 상사의 권위적인 태도에 억눌린 활동가가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유롭게 드나들고, 누구도 무리하지 않는 판'을 만들 수 있을 리 만무하다.
(2) 그리고 새로운 협동의 관계들
이 부분에선 생협이 큰 가능성을 가진다고 생각된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재난이 발생했을 경우 군대나 소방 등 국가의 대비 시스템이 가장 먼저 발동한다. 그런데 민간 영역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유로 인해 이미 잘 엮어진 민간 네트워크다. 그런 점에서 안전에 민감한 생협 조합원들이 재난 교육을 먼저 받고, 지역사회 재난 대응의 거점으로 활동하는 것은 어떨까?
지역 사회복지단체, 대학과 협력한 안산의 힐링센터0416쉼과힘 역시 매우 효과적인 협업 사례다. 심리 지원이 필요한 유가족들에게 심리 전문가와 지역사회를 잘 아는 복지사들이 함께 만나 지원 모델을 구축했다.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서도 지역의 활용 가능한 자원을 파악하고 엮어둘 필요가 있다.
재난 대비 방법 중 많이 쓰이는 것이 ‘위험 지도 만들기'다. 우리 마을의 위험 요소를 살펴보고, 위험이 발생할 경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을 지도로 만들어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마을에 누가 살고 어떤 위험 요소가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장애인, 노약자 가구를 살피고, 대피로의 불편함을 확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첫째, 위험 제거를 위해 마을에서 무엇을 할지, 둘째, 정부나 행정의 변화가 필요하다면 어떻게 요구할지, 셋째, 유사시 어떻게 대처할지를 찾는다. 단순히 위험 요소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위험 발생 시 연결 가능한 네트워크 찾기 방식으로 접근해 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동네 슈퍼가 있으니 식량은 슈퍼에서 구하고, 심리상담사는 어느 곳에 살고 있으니 그곳을 찾으면 된다는 식이다. 고베시처럼 ‘이 집에 누가 사는데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는 정도까지 가능한 공동체가 만들어지면 더욱 좋다. 그러나 익명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도시에서는 유사시 작동가능한 네트워크를 확인해두는 정도로도 큰 의미가 있다.
재난이 닥치지 않는다면 가장 좋겠지만, 재난을 잘 대비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확산된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시민성, 사회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번 포럼에서 다뤄진 다양한 활동을 돌아보며 촘촘한 공동체가 버거운 ‘젊은 것들' 중의 한 명으로 재난 회복력 공동체를 위한 상상을 해본다.
‘각자가 양손을 옆으로 쭉 뻗어본다. 충분히 혼자 팔을 흔들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선다. 도움이 필요할 때, 힘을 주어 손을 조금 더 뻗어본다. 그러면 누군가의 손이 잡힌다.'
재난이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익명성에 기대어 살아가는 도시에서 재난을 대하는 협동은 이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자유롭고, 무리하지 않고, 재미있게! 하지만 도움이 필요할 땐 누군가의 손이 꽉 잡히는 새로운 협동을 꿈꿔본다.
박선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 연구원 sona@hani.co.kr
※ 이 글은 ‘생협평론’ 2018년 봄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840794.html#csidxd6a81d94a4ecd548e7aaf58f8cb16a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