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의 눈
인터넷 커뮤니티 ‘헬(hell)조선’(hellkorea.com)에는 대한민국의 익숙한 문법을 조롱하는 글이 넘쳐난다. 한 대기업이 정시퇴근제를 실시하는 요일을 ‘오늘은 뻔뻔(funfun)한 날’이라고 일컫는 것에 대한 반응을 보자. ‘뻔뻔해도 괜찮다’는 메시지에서 야근 의무감에 짓눌린 직원들을 안심시키려는 회사의 아량과 배려를 읽어내는 게 ‘대한민국의 독해’다. 헬조선의 독해는 “된장, 일주일에 한번 정시퇴근하는 것도 뻔뻔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다니…”다. 근로기준법이 정한 8시간 노동, 6시 퇴근이 ‘뻔뻔함을 무릅쓰는 돌출행동’이 된 부조리한 현실을 야유한다.

헬조선에는 애국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수두룩하다. 대한민국은 ‘현실이 괴롭더라도 참고 노력하면 좋은 날이 온다’고 말하지만, 헬조선은 실력주의가 통하지 않는 현실을 고발한다. 게시글로 올라온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제목의 웹툰을 보면, 국회의원 아버지가 기업에 전화를 걸어 자기 딸의 지원 사실을 버젓이 공지하는 ‘21세기 한국’은 상류층 자녀들이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고 버젓이 채용(음서제)되던 ‘12세기 고려’와 다를 바 없는 미개한 사회다. 특히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현대판 갑질의 당사자가 야당 국회의원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사실 좌파·우파는 헬조선에서 통하는 상식이 아니”며 “기득권·비기득권으로 봐야” 한다거나, “전세계 스케일로 보면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 같은지 알 수 있다”며 나름의 통찰을 공유한다. 부모의 기득권으로 자녀의 미래를 살 수 있는 현실에서 “노력을 통해서만 약육강식의 세상을 벗어날 수 있다”는 기존 문법은 비현실적이다. “공부 열심히 해서 원하는 대학에 가도, 노력을 거듭해 좋은 기술을 갖춰도, 우리에게 남는 것은 빚, 실업, 박봉에 허덕이는 삶.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는 헬조선의 현실 문법을 설득할 수 없다.

헬조선이 풍자하는 실체는, 가장 낮은 수준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에 머물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헬한국’이 아닌 ‘헬조선’이라 이름 붙인 까닭도, 근대화 이전과 지금의 한국이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인식 때문일 게다. 이곳 게시판에 유독 ‘미개하다’ ‘후지다’라는 표현이 많은 걸 보면, 이들의 기준은 이념이 아니라 상식과 합리성에 가깝다. 상식과 정상을 말하는 정치인들은 헬조선이 애국하지 않는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

진명선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연구원 torani@hani.co.kr

등록: 2015-08-31 19:33수정: 2015-09-01 10:02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70675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