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뉴스

[세상읽기] 한마디의 충고

HERI 2011. 06. 27
조회수 6418
2010-08-17
한겨레 이원재 기자
<script></script>
»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장

올해 여름휴가 회심의 피서지는 과천시민회관 빙상장이었다. 푹푹 찌는 더위에 얼음이 가득한 곳에서, 일에 찌든 몸을 스케이트에 실어 단련시킬 수 있는 곳. 게다가 내 휴가의 최대 고객인 아이까지도 만족시킬 수 있는 곳. 그야말로 일석삼조의 피서지였다.

그런데 얼음 위에 스케이트를 대는 순간부터, 시원함은 가시고 등줄기에는 땀이 줄줄 흘렀다. 온몸은 굳어 가눌 수 없었다. 스케이트를 마지막으로 신었던 10여년 전의 기억은 아득하기만 했다. 똑바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그렇게 몇 바퀴를 휘청거리며 돌았다. 상황은 나아졌다. 이제 벽을 잡지 않고도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청바지를 입은 채 유유히 빙상장을 미끄러지던 한 할아버지가 내 앞에 나타났던 것은. 나를 따라와 마주보고선 그 할아버지는 딱 한마디의 충고를 던진다.

“천천히, 오른쪽-왼쪽으로 중심만 차례로 옮겨 보세요. 앞으로 나가려 하지 말고, 중심을 가운데에 유지하려 하지 말고, 발을 빨리 바꾸려 하지 말고. 그것만 해보세요. 잘될 겁니다.”

그러고는 유유히 떠나버린다.

그런데 그 한마디로, 초등학생 시절 이래 30년 스케이트 인생의 한이 풀렸다. 나는 앞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몇 바퀴를 서지 않고 계속 돌았다. 스케이트 신고 걷고 움직이기에 막 성공하던 그 시점, 내게 꼭 맞는 조언이었다. 그날 나는, 생애 가장 스케이트를 잘 탄 하루를 보냈다.

그 한마디의 충고는 내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짧지만 강력했고, 내 상황에 꼭 맞았고, 결과적으로 좋은 성과를 내게 했던, 그런 충고였다.


우리 시대는 지금, 길고 지루하고 무의미한 충고로 넘쳐난다. 충고의 주체는 국가나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다. 충고의 대상은 20대, 30대 청년층이다. 대표적인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우선 ‘내가 예전에 이렇게 타 봐서 아는데’라는 식의 복고형 충고다. 경험이 많은 경영자가 빠지기 쉬운 유혹이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되풀이하면 모두 성공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흘러간 옛 노래’로만 받아들여진다.

‘나는 스케이트 살 돈도 없었는데 지금은 잘 탄다’는 식의 입지전형 충고도 있다. 고위 공직자나 대기업 경영자가 ‘나는 농민의 아들, 서민의 아들로 태어나서 여기까지 왔으니 당신도 희망을 가져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다. ‘나는 같거나 더 나은 집 아들이고 딸인데 이 모양이니, 내가 정말 못난 모양’이라는 절망만 불러온다.

‘이 시기 한국에서 스케이트는 이렇게 타야만 옳다’는 식의 역사적 당위형 충고도 있다. 말은 옳지만 그저 무겁고 부담되어서 외면하게 되는 조언이다.

모두 충고보다는 훈계나 지시에 가까운 말들이다.

충고란 쉬운 일이 아니다. 충고의 내용도 잘 알아야 하지만, 충고의 대상도 정말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청년에게 충고하려면, 청년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지만, 그보다도 청년을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전쟁과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모두 거쳤다. 모두 극복했고 이루었고 얻어냈다. 주먹 쥐고 지켜야 할 나라도, 새벽종 소리 들으며 일으켜야 할 경제도, 목숨 걸고 이뤄야 할 이념도 없어 보이는 게 지금의 한국 사회다. 적어도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하는 청년에게는 그렇다.

속해 있는 사회, 속해 있는 기업에서 자신이 이룰 사명과 비전이 명확하지 않을 때 청년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중심을 천천히 옮겨 보라’는 빙상장의 충고처럼,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충고는 어떤 것일까? 쉬운 일은 아니다.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내가 그거 해봤는데’,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하면서 두뇌부터 심장까지 간섭하고 지시하려는 분들은 이제 국가도 기업도 제대로 경영하기 어렵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장timelast@hani.co.kr 
<script></script>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정책토론> 진보 “협정발효땐 집권해도 할수 있는게 없어”

2011-03-08 진보 “협정발효땐 집권해도 할수 있는게 없어”왜 한-미FTA 토론인가 “이대로 한미FTA가 체결되면, 집권하더라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진보개혁진영의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한미FTA를 막아야 하고, 더 거대하...

  • HERI
  • 2011.06.27
  • 조회수 6920

<정책토론회> 야4당 정당연구소 손잡고 ‘정책연합’ 밑돌

2011-03-08 민주·민노·진보·참여당 등 시민사회 함께 ‘월례포럼’ 2010년 6월의 지방선거를 앞두고 야 5당과 4개 시민사회단체는 소위 ‘5+4 회의’를 통해 연합정치의 가능성을 실험했다. 그러나 2010년 3월 진보신당은 후보선출 ...

  • HERI
  • 2011.06.27
  • 조회수 6672

[세상 읽기] 복지‘국가’만으로는 부족하다

자동차가 달리려면 기름을 넣어야 한다. 그러나 기름만 넣는다고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빠르고 안전하고 편안하게 움직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더욱 생각할 것이 많다. 차체가 튼튼하고 안전해야 하고, 운전기사도 ...

  • HERI
  • 2011.06.27
  • 조회수 6804

[세상읽기] 기업 사회책임경영과 외교

2006년, 중국 베이징에 한국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에 대해 발표하러 간 일이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였을 때이다. 대사관이 중국 기업 및 학자들과의 교류 프로그램 주제로 기업 사회책임경영(CSR)을 선정해 진행했다. 5년...

  • HERI
  • 2011.06.27
  • 조회수 7642

[2010 아시아 미래포럼] “공동체·조화 ‘아시아 가치’가 기업성장 디딤돌”

2010-12-22 동아시아 기업의 진화 <5부> 한겨레-한겨레경제연구소 공동기획 “가격경쟁력보다 지속가능성 중요해져 단기성장 위주의 평가·보상은 개선을” ‘사람과 공동체, 조화의 중시.’ 16일 분과토론의 정수는 ‘아시아적 맥락에서의...

  • HERI
  • 2011.06.27
  • 조회수 7090

[2010 아시아 미래포험] “세계경제 주역 아시아, 역내문제 해결 주체로”

2010-12-22 동아시아 기업의 진화 <5부> 한겨레-한겨레경제연구소 공동기획 동아시아 GDP 15조로 미국·EU 제쳤지만 자국문제에 치우쳐 아시아 문제 등한시 “기업들, 책임있는 시장경제 구현 나서야” 최우성 기자 <script></scrip...

  • HERI
  • 2011.06.27
  • 조회수 7181

[2010 아시아 미래포럼] 사회책임경영 42.3점…자동차 ‘선두’ 소매 ‘꼴찌’

2010-12-22 <script></script> » 안철수 카이스트 기술경영전문대학원 석좌교수가 15일 오전 서울 강남구 역삼동 리츠칼튼호텔에서 열린 아시아 미래포럼에서 ‘벤처기업 성공의 조건’을 주제로 특별 연설을 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

  • HERI
  • 2011.06.27
  • 조회수 7162

[2010 아시아 미래포럼] “지식·인적자본 개발을” “국가-기업관계 새 틀을”

아오키 마사히코(스탠퍼드대 교수) “종업원 등 기업 공동체 집단지성 키워 나가야” 장하준(케임브리지대 교수) “주주이익 극대화하는 경영 패러다임 바꿔야” » ‘2010 한국 사회책임경영(CSR) 대상’ 수상자들이 15일 저녁 서울...

  • HERI
  • 2011.06.27
  • 조회수 7436

[아시아미래포럼]“사회적 책임경영이 기업의 성장동력”

2010-12-22 아시아 미래포럼 개막…기아차·삼성SDI ‘사회책임경영 대상’ 최우성 기자 » 15일 오전 서울 강남구 역삼동 리츠칼튼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2010 아시아 미래포럼’에서 참석자들이 ‘경쟁과 협력-새로운 아시아 ...

  • HERI
  • 2011.06.27
  • 조회수 7352

아시아미래포럼 향연 ‘전주곡’ 릴레이

2010-11-23 아시아미래포럼 향연 ‘전주곡’ 릴레이 [하니스페셜] 착한경제/ <script></script>  한겨레경제연구소(HERI)가 운영하는 경제웹진 ‘착한경제’(goodeconomy.hani.co.kr)에서는 지난 12일부터 ‘2010 아시아미래포럼’ 특별시리즈가 ...

  • HERI
  • 2011.06.27
  • 조회수 6924

[세상읽기] 한-EU FTA에서 눈여겨볼 점

»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장 한국과 유럽연합(EU)이 자유무역협정(FTA)에 서명했다. 언론에는 국책연구소 보고서를 인용한 장밋빛 전망이 넘쳐나지만, 나는 심드렁했다. 경제 예측, 특히 장기적 예측은 의미를 갖기 어렵다. 목표...

  • HERI
  • 2011.06.27
  • 조회수 6533

[동아시아기업의진화] “품질은 일본차” 고객 신뢰로 리콜사태 넘겼다

2010-10-07 [동아시아 기업의 진화] 3부 일본-영광이여 다시 한번 황예랑 기자 이원재 기자 <script></script> » 일본 3대 자동차업체의 신흥시장 판매량 추이 1. 자동차 산업, ‘인간존중’ 경영철학은 계속된다 도쿄에서 130㎞ 떨어...

  • HERI
  • 2011.06.27
  • 조회수 8461

[세상읽기] 다시 떠올리는 동북아 균형자론

2010-09-25 “저게 중국 스타일이에요.” 옆에 앉은 일본 전문가가 흉보듯 말을 건넸다. 국제 세미나 행사가 예정보다 30분이나 늦어지고 있었다. 한·중·일 전문가가 모여 기업의 사회책임경영에 대해 논의하는, 유엔글로벌콤팩트 한...

  • HERI
  • 2011.06.27
  • 조회수 6504

‘아시아형’ 사회책임경영 기준 마련

2010-08-23 한·중·일 전문가 평가모델 확정 “서구와 다른 지역특수성 반영” 기업의 사회책임경영(CSR)이 핵심 과제로 떠오른 가운데, 한국·중국·일본 전문가들이 아시아 사회의 전통과 가치를 담은 새로운 사회책임경영 평가기준을...

  • HERI
  • 2011.06.27
  • 조회수 6661

[사설] 아시아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주도해야

2010-08-23 한·중·일 세 나라 전문가들이 어제 한국에 모여 아시아적 특성을 고려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평가모델을 마련했다. 한겨레경제연구소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이를 확산, 발전시키기 위해 기...

  • HERI
  • 2011.06.27
  • 조회수 6731

[한중일전문가회의] 사회책임경영 새 잣대, ‘공동체 가치’를 원동력으로

2010-08-23 ‘아시아형 CSR 평가모델’ 내용 서구잣대 벗어난 ‘동양적 재구성’ 국제기준 새 구축 고용 문제 큰 비중…‘후진적 경영문화 개선’ 과제 최우성 기자 <script></script> » 지난 21일 저녁 아시아 사회책임경영(CSR...

  • HERI
  • 2011.06.27
  • 조회수 7275

[세상읽기] 한마디의 충고

2010-08-17 이원재 기자 <script></script> »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장 올해 여름휴가 회심의 피서지는 과천시민회관 빙상장이었다. 푹푹 찌는 더위에 얼음이 가득한 곳에서, 일에 찌든 몸을 스케이트에 실어 단련시킬 수 있는 곳...

  • HERI
  • 2011.06.27
  • 조회수 6418

풍년 든다는데 농민은 시름 “유기농이 답이오”

[한겨레가 만난 사람] ‘사회적 기업’ 흙살림 이태근 회장 » 이태근 회장이 충북 오창 흙살림 본사의 작은 텃논에 살고 있는 우렁이를 들어보이고 있다. 이 회장은 2~3평의 도시텃논에 여러 종의 토종벼를 재배하는 도시텃...

  • HERI
  • 2011.06.27
  • 조회수 7799

참된 경영자, 경영학을 버려라

잠깐독서 » 〈위험한 경영학〉 판검사나 의사 같은 전통적인 ‘엄친아’ 외에, 언젠가부터 다른 엄친아가 눈에 띈다.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의 우수한 경영대학원(MBA)을 다녔으며, 직장은 금융권이나 컨설팅회사에 다니는 이들...

  • HERI
  • 2011.06.27
  • 조회수 6945

[동아시아 기업의 진화] 자원 확보 발벗고 나선 ‘에너지 대국’

[동아시아 기업의 진화] 2부 중국-열강의 포효 5. 에너지 공룡의 도전 이형섭 기자 » 중국의 석유 소비량 추이 중국, 유전 사들이고 신재생에너지 개발 국영기업이 앞장…외국업체 인수·합병도 미국의 100년 아성이 드디어 무...

  • HERI
  • 2011.06.27
  • 조회수 7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