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timelast@seri.org
이주의 용어
입소문 마케팅(Word-of-mouth marketing, buzz
marketing)
영화 고를 때 인터넷 댓글 찾아보는 건 필수다. 나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이 쓴 듯한 댓글을
참고 삼아 영화를 결정하면 실패 확률이 크게 떨어진다. 영화전문 기자나 평론가처럼 고상한 식견을 갖추지 못한 탓일까. 그런 전문가의 글보다는
댓글에서 더 중요한 정보를 얻는 일이 종종 있다.
소비자들의 내밀한 속삭임을 들어라
점잖은 전문가의 글과 달리, 이런 댓글 중에는 심심치 않게 ‘악플’도 보인다. 대놓고 주연배우나 감독을 공격하는 글을 보면 섬뜩할 때도 흔하다. 그 감독이나 배우가 입을 상처를 짐짓 걱정해보기도 한다.
△ 인터넷 댓글은
현대판 ‘입소문’ 마케팅이다. 서울의 한 영화관에<괴물>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든 관객들.(사진 / 한겨레
박종식) |
물론 반대로 배우나 감독의 극성팬들이 일방적으로 칭송하는 댓글을 다는 일도 있다. 이른바 ‘선플’이다. 역시나 낯이 뜨겁다. 한참을 즐거움과 불쾌감을 오가며 댓글을 읽다가, 문득 다시 직업적인 의문으로 되돌아간다. 이렇게 붙어 있는 댓글은, 정작 그 영화 매출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미국 시라큐스대학의 용 뤼 교수는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 직접 분석에 착수했다. ‘야후 무비’ 사이트에 직접 접속해 거기에 소개된 40개 영화에 대한 댓글 1만2천 개를 모았다. 그러고는 어떤 영화에 대한 한 주일 동안의 인터넷 댓글이 다음주 영화 매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분석했다.
분석 결과 인터넷 댓글 수는 영화 매출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댓글 수가 많을수록 매출이 늘어났다.
그런데 그 댓글 중 ‘선플’과 ‘악플’의 비중이 얼마나 되느냐는 영화 매출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악평을 많이 받았더라도, 많은 관심을 받고 논란을 불러일으킨 영화는 대체로 성공했다는 이야기다. 이제야 가끔 분명히 비난받을 만한 장면을 내세우는 영화들이 ‘경제적으로’ 이해가 된다. 영화 제작자가 인식했든 하지 못했든, 여기에는 장삿속이 숨어 있었다. 악평을 받더라도, 일단 평을 많이 받고 논란의 대상이 되면 매출이 올라간다는 과학적 연구 결과가 나왔으니 말이다.
인터넷 댓글은 소비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즉 입소문이다. 과거에는 점심식사 자리나 찻집에서 오가던 입소문이 웹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소통되고 있는 것이다. 정보 유통 속도가 빨라지면서, 입소문의 경제적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있다. 소비자들은 기업이 일방적으로 전해주는 제품 정보보다,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소비자가 전해주는 정보를 더 신뢰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기업들은 소비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매출을 늘리는 전략인, 입소문 마케팅(Word-of-mouth marketing)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입소문 마케팅은 와글와글 떠드는 저잣거리의 소문을 묘사한 버즈 마케팅(buzz marketing)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전통적인 마케팅은 기업에서 메시지를 발신해 소비자가 수신하는 방식이다. 광고가 대표적 전통 마케팅 기법이다. 여기서는 기업이 소비자에게 어떻게 제품을 잘 알리느냐가 관건이다. 그러나 입소문 마케팅은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기업이 발신자가 아니고 소비자 스스로가 발신자가 된다. 당연히 기업 마케팅 전략의 목표물도 기업과 소비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소비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바뀐다.
대규모 광고 공세만으로 마케팅이 끝났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기업가다. 마케팅 활동의 중심축은 소비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점점 분산되고 있다. 마케팅 이론 역시 변화하고 있다. 원래 경영학의 한 분야로서의 마케팅 이론은, 통계학이나 심리학 등 각종 이론적 틀을 이용해 언론이나 광고가 기업이나 제품의 이미지를 소비자에게 어떻게 전달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소비자 사이에 오가는 내밀한 속삭임까지 다뤄야 하는 학문으로 그 영역을 크게 넓히고 있다.
악플을 즐기는 사람이 명심해야 할 것
소비자의 역할도 달라진다. 동사 ‘소비하다’는 이제 수동형이 아니고 능동형이다. 입소문이 매출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경제에서는, 소비자가 기업과는 독립적으로 메시지를 만들어 발신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진다.
앨빈 토플러가 최근 저서 <부의 미래>에서 이야기하는 ‘생산하는 소비자’(프로슈머)도 이런 변화의 흐름을 짚는 개념이다.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지식시대에는 소비자가 단순히 생산자의 제품과 서비스를 소비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메시지를 발신해 제품과 서비스에 영향을 끼치고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내기까지 하는 존재라는 이야기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악플’을 즐기는 독자가 계시다면 명심하시라. 당신이 취미 삼아 단 댓글 하나가 제품과 기업을 바꾸면서,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뒤바꿀 수 있다. 한 번 더 생각하는 정도의 책임감은 발휘해줘야 부끄럽지 않은 시민 아니겠는가. 게다가 당신의 의도와 반대로, ‘악플’ 세례를 받은 영화는 오히려 매출이 늘었다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