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새 정부 초대 총리 후보로 지명된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3일 서울 통의동 인수위 기자회견장에서 발언을 하기 위해 마스크를 벗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새 정부 초대 총리 후보로 지명된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3일 서울 통의동 인수위 기자회견장에서 발언을 하기 위해 마스크를 벗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흔하게 보지만 계속 없는 척하기. 한국은 공식적으로 로비스트가 없는 나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당사자가 아닌 사람의 로비 행위를 전면 금지하는 유일한 나라이다.(2017년 국회입법조사처) 그런데 그리 생각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형 로펌(법률회사)이나 국내외 대기업에 고문, 전문위원, 임원 직함으로 고용된 전직 고위 관료들. 총리·장관·청와대 인사 때면 ‘회전문’을 한 바퀴 돌아 나와 다시 공직을 꿰차는 그들. 이번 조각에서 총리나 장관 후보로 거론된 인물 중 여럿이 대형 로펌 소속이다. 한덕수 총리 후보자부터 최대 로펌인 김앤장에서 4년4개월간 고문으로 일하고 19억7천여만원을 받았다. 능력이 우선이라는 윤석열 당선자는 이해충돌 우려나 도덕적 흠결은 눈감고 가자는 식이다. 문재인 정부도 크게 다를 것 없었다.

이들은 로비스트이다. 주업은 내밀한 정보 알아내기. 10대 로펌에서 파트너로 일한 변호사는 말한다. “힘센 부처의 동향을 파악해 오길 기대한다. 현안이 있는 기업은 당국의 생각이 궁금하다. 알면 대책을 세울 수 있어서다. 그러다 보니 로펌이 고민 있는 기업을 찾아가 ‘이번에 이런 분을 고문으로 모셔 왔다’고 마케팅하기도 한다.”

직전 대법원장까지 법정에 서게 된 ‘재판 거래’ 사건도 로펌에 몸담은 전직 관료가 물어 온 정보가 발단이 됐다. 일제 강제노역 배상소송에서 일본 전범 기업을 대리하던 김앤장에 2014년 11월 ‘중대한 정보’가 입수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개인의 청구권이 살아 있는 것으로 대법원 판결이 나지 않도록) 조처를 하도록 지시했다’는 내용이었다. 고문으로 있는 현홍주 전 주미대사(2017년 사망)와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청와대 동향을 알아 와 보고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김앤장이 청와대와 외교부를 ‘동원’해 대법원 재판부를 유리한 쪽으로 바꾸려 무리수를 둔 게 이 사건이다.

법이나 시행령에는 모호한 구석이 많다. 관료의 재량에 남겨진 이런 회색 지대가 로비스트가 운신하는 공간이다.

‘먹튀’ 논란으로 번진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에서도 확인됐다. 사모펀드인 론스타는 애초 은행 인수 자격이 없었다. 다만 은행법 시행령에는 ‘부실 금융기관 정리 등 특별한 사유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라는 예외 규정이 있었다. 외환은행은 부실 금융기관이 아니었지만, 당국은 잠재부실을 고려할 때 예외에 해당한다고 해석해 허가했다. 어이없는 일은 시행령 해석을 정부가 론스타의 법률 자문을 맡고 있던 김앤장에 의뢰한 것이다. 재정경제부는 ‘예외 인정 가능’이란 김앤장 검토 의견서를 비공식적으로 받아, 금융감독위원회에 같은 내용의 공문을 보내 인수를 허가해줄 것을 요청한다. 김앤장이 선수 겸 심판인 셈이다. 그 무렵 김앤장에는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와 경제수석을 지낸 한덕수씨가 고문으로 있었다. 조심스러운 공무원들이 이렇게 과감히 움직인 게 우연이었을까?

대기업, 지급능력 있는 사람 편에서 로비스트가 일을 만들어갈 때, 누군가는 손해를 보고 눈물짓는다. 로비스트들이 “밥 먹자, 운동하자” 하며 후배에게서 알아내는 ‘고급 정보’는 공공재이지 사익 추구에 쓰일 게 아니다.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는 “민주주의는 보이게 하는 것”이라 말한다. 관료, 법률가 등 보이지 않는 전문가 권력의 비대화는 민주주의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물론 규제가 많아 로비 수요가 있고, 당국에 민간의 입장을 설명할 창구도 필요한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로비 활동의 투명성이라도 높여야 한다. 2018년 공정거래위원회가 도입한 것처럼, 공무원이 외부인 누구를 만나 뭘 했는지 즉각 소상히 보고하는 제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의 견제 장치는 로비스트가 바로 공직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받는 수억원의 연봉은 현직이 돌아가는 얘기를 해주고 부탁을 들어주기에 가능하다. 현직이 엄정하게 처신하면 되는 일이지만 그들은 로비스트가 장차관으로 돌아와 내 인사를 좌우할까 두렵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의 박영선 의원이 1급 이상 공무원이 로펌 등에 몸담은 경우, 퇴직 후 2년 이내에 국무총리, 국무위원, 국세청장 등에 임명될 수 없도록 하는 이른바 ‘회전문 방지법’을 발의했으나 입법은 불발됐다. 172석의 민주당이 이런 법 제정에 힘을 쓰면 국민이 박수 칠 것이다.

bhlee@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38966.html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아침햇발] 정책 상상력이 아쉬운 ‘올드보이’ 정부 / 이봉현

정부는 기름값이 급등하자 유류세를 법적 한도인 37%까지 인하했다.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대흥동의 한 주유소에서 내 건 유가 알림판에 휘발유가격이 2169원 표시되어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이봉현 | 경제사...

  • HERI
  • 2022.07.19
  • 조회수 801

[유레카] 카톡에 올린 자녀 사진의 프라이버시권

2016년 캐나다 캘거리에 사는 당시 13살 소년 대런 랜들이 부모를 상대로 합의금 수억원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부모가 자기 얼굴에 초콜릿을 묻히고 사진을 찍는 등 아기 시절 ‘굴욕 사진’들을 페이스북에 10년 넘게 공...

  • HERI
  • 2022.07.13
  • 조회수 1060

당신의 임신 중지, 빅테크 ‘디지털 흔적’으로 남아 있다

임신중지 기소때 디지털증거 활용관행 위치 정보, 문자메시지, 검색 기록 등 “공권력의 디지털정보 요청을 빅테크가 판단·결정할 수 있는가” 빅테크의 민주적 정당성 문제 부각 지난 6월 25일 시민들이 미국 연방대법원 청사 ...

  • HERI
  • 2022.07.13
  • 조회수 964

[아침햇발] 대통령이 ‘바이네르 구두’를 살 때 못 들은 이야기 / 곽정수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첫 주말인 지난 5월14일 부인 김건희 여사와 서울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의 바이네르 매장을 찾아 제품들을 둘러보고 있다. 바이네르 제공 곽정수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김원길(61) 바이네르 대표...

  • HERI
  • 2022.06.27
  • 조회수 1136

[아침햇발] ESG에 부는 역풍 / 이봉현

지난 2년간 한국 기업에도 이에스지 ‘열풍’이 불어 이에스지 위원회를 꾸리고 경영의 지표로 삼는 기업이 크게 늘었다. 한국거래소 누리집 갈무리 이봉현ㅣ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테슬라의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가 이에...

  • HERI
  • 2022.06.22
  • 조회수 1265

[유레카] 인터넷 익스플로러와 한국 웹환경 / 구본권

웹브라우저의 대명사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출시 27년 만에 사라졌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예고해온 대로 지난 15일 익스플로러에 대한 지원을 공식 종료했다. 이날 이후 익스플로러를 실행하면 엠에스의 새 브라우저인 ‘에지...

  • HERI
  • 2022.06.20
  • 조회수 1029

[아침햇발] ‘신기업가정신’ 선언이 쇼가 아니라면 / 곽정수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주주에 대한 봉사와 이윤 극대화라는 가치를 넘어 종업원과 고객, 납품업체 등 모든 이해관계자들에 대한 사회적 책무를 강화하겠다.” 2019년 8월19일 미국 200대 대기업 협의체인 비즈니...

  • HERI
  • 2022.05.31
  • 조회수 1201

[아침햇발] ‘한국이 말한다’를 시작할 때

2017년부터 해마다 열리는 ‘독일이 말한다’에서 생각이 크게 다른 두 사람이 짝을 이뤄 대화를 하고 있다. <디 차이트> 온라인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소셜미디어를 넘겨보다 몇번 불편하면 ‘친구 끊기’를 ...

  • HERI
  • 2022.05.20
  • 조회수 1249

[유레카] ‘반지성주의’와 ‘투명성’ / 구본권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0일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를 화두로 밝혔다. 윤 대통령은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 HERI
  • 2022.05.16
  • 조회수 1299

[유레카] ‘고발당한’ 노사협의회 / 곽정수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지난 3일 윤석열 정부의 110대 국정과제를 발표했다.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다면서 51번째 과제로 노사협력을 제시했다. 또 이를 위해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의 대표성·독립성 강화를 통해 참...

  • HERI
  • 2022.05.08
  • 조회수 1510

[유레카] 넷플릭스 신화의 추락과 뉴노멀 / 구본권

코로나19로 인한 일부 현상은 팬데믹이 지나가도 일상으로 자리잡을 ‘새로운 표준’(뉴노멀)이 될 것이라고 예측됐다. 비대면 회의와 배달 문화, 영화관 대신 온라인 동영상 감상 등이 대표적 사례인데 팬데믹 탈출 시기에 검증...

  • HERI
  • 2022.04.26
  • 조회수 1239

[유레카] 박용만, 윤석열과 정치 /곽정수

박용만 전 대한상의 회장이 최근 윤석열 정부의 첫 총리 후보설 , 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설에 대해 “정치할 생각이 없다”며 확실히 선을 그었다. 1년 전 박 전 회장이 상의 회장을 그만두기 직전에 인터뷰한 적이 있다. ...

  • HERI
  • 2022.04.25
  • 조회수 1231

[아침햇발] 로비스트가 총리·장관 하면 안된다 / 이봉현

새 정부 초대 총리 후보로 지명된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3일 서울 통의동 인수위 기자회견장에서 발언을 하기 위해 마스크를 벗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흔하게 보지만 계속 없는 척하기...

  • HERI
  • 2022.04.15
  • 조회수 1094

[유레카] 삼성 수사와 윤석열의 ‘친기업’ / 곽정수

검찰이 최근 삼성전자와 웰스토리를 압수수색했다. 공정위가 지난해 6월 삼성전자 등이 웰스토리에 사내 급식 물량 몰아주기를 했다면서 2349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고발한 지 9개월 만이다. 그동안 뒷짐 지고 있던 검찰이 ...

  • HERI
  • 2022.04.11
  • 조회수 1592

[유레카] 아마존 노조와 빅테크 힘의 균형 / 구본권

지난 1일 세계 최대 온라인상거래 업체 아마존에서 노조 설립안이 통과했다. 미국 뉴욕의 스태튼아일랜드 아마존물류센터 직원들의 투표 결과, 55%가 찬성했다. 1994년 온라인 서점으로 출발해 디지털 삶을 혁신시켜온 아마존닷컴...

  • HERI
  • 2022.04.05
  • 조회수 1009

[유레카] 러시아를 꿇린 31살 우크라 장관의 사이버 전투/ 구본권

땅, 바다, 하늘에 이어 사이버 공간을 제4의 영토로 선언하고 사이버군대를 창설한 국가가 여럿이다. 미국은 2009년, 한국은 2010년 사이버사령부를 창설해 정보전쟁을 대비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정보전이 또하나...

  • HERI
  • 2022.03.16
  • 조회수 1477

[아침햇발] 플랫폼, 규제와 진흥의 줄타기 / 이봉현

지난해 11월 마포구 용강동에서 한 배달노동자가 배달음식을 오토바이 상자에 담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이봉현 경제사회연구원장·논설위원 아파트 정문이 내려다보이는 집에 살다 보니 저녁의 한적함을 잊은 지...

  • HERI
  • 2022.03.15
  • 조회수 1710

[유레카] 정부 정책 뒤집기 ‘올인’ Y(윤석열)노믹스가 놓친 것들

대통령 이름에 이코노믹스(경제학)의 뒷부분을 붙인 합성어는 특정 정부의 차별화된 경제정책을 함축하는 용어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레이거노믹스’가 대표적이다. 감세, 정부지출 축소, 규제 완화 등 공급 중시 ...

  • HERI
  • 2022.03.15
  • 조회수 1188

D-데이 훤히 내다보고, 틱톡으로 여론 모으고…초연결시대의 전쟁

“틱톡은 전쟁위해 설계된 도구” 짧은 동영상 순식간 세계 전파 우크라이나 지지 여론 확산 기여 콘텐츠 승리로 현실 해결 못해 2011년 ‘아랍의 봄’ 무위로 끝나 빅테크 기업 ‘이미지 쇄신’ 기회 중립 위치·책임 회피 어...

  • HERI
  • 2022.03.07
  • 조회수 1049

대선 주자도 모르는 부동산 문제 해결법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20] 공공 지원으로 시세보다 저렴한 사회주택 입주민엔 좋지만, 주택 공급자는 무관심 사회주택 사업자에 인내 자본 공급해 양질의 사회주택 많이 보급하게끔 해야 정부의 적극적 금융 지원이 필...

  • HERI
  • 2022.02.28
  • 조회수 1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