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자조 금융이 만들어내는 집단지성의 힘

admin 2021. 10. 26
조회수 320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미국 뉴욕시 저소득층 거주지역의 지역밀착신협(CDCU) 활동을 소개하는 누리집(lespeoples.org)
미국 뉴욕시 저소득층 거주지역의 지역밀착신협(CDCU) 활동을 소개하는 누리집(lespeoples.org)

‘보조금 24’라는 누리집이 있다. 국가가 제공하는 각종 지원금을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든 온라인 전용 창구다. 개인이 받을 수 있는 정부 보조금 수는 300개가 넘는데, 중앙·지방정부가 발주하는 공공사업에도 이런저런 명목의 지원금이 붙는다. 공익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일이니만큼 사업 참여자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경제 기업이 국가의 보조금을 받아 사업을 진행하는 건 좋은 일일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지원 자격만 갖추면 보조금도 받고 새로운 사업 기회도 얻으며, 부족한 운영자금을 메울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경제 기업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중독성이 강한 탓에 경계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정당한 절차와 방법으로 기회를 얻는 것인데 무엇이 문제가 될까? 본인들이 만든 상품과 서비스로 고객을 만족시키려 하지 않고, 정부가 제공하는 혜택에 안주하려는 관성이 생기는 게 문제다. 근육을 단련하지 않고 운동 경기에서 계속 좋은 성적을 거둘 수는 없다.

지난 몇 년 사이 공공과 민간 영역에 사회적 경제 기업과 소셜 벤처를 지원하는 제도와 기금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 돈은 당사자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막혔던 현금 흐름을 풀어주는 열쇠로, 기업의 성장을 견인하는 촉매제로 기능했을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지원금으로 인해 근육량이 줄어드는 퇴보가 일어났을 수도 있다. 보조금과 금융은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돈을 빌리거나 투자를 받으면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긴다. 책임 의식과 상환 의지는 기업을 성장시키는 거름이 된다. 보조금에 의지해 살아가는 기업이 얻을 수 없는 튼튼한 근육을 만들어 준다. 무리한 욕심으로 과다한 부채를 짊어지는 건 잘못이지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금융을 적절히 활용하는 건 기업의 성장을 위한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정부의 지원금은 상수가 아니다. 정치적 환경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외부의 지원 없이 작동되는 자조·연대기금이 필요한 이유다. 자신들의 힘으로 일구어낸 것보다 단단한 건 없다. 하지만 구성원들 다수가 취지와 목적에 동의하더라도, 돈을 모으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왜 그럴까?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절실하지 않고, 더 편한 길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무담보 소액대출(마이크로크래딧) 사업의 효시라 일컬어지는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 모델은 집단대출 방식으로 운영된다. 돈은 개인에게 빌려주지만, 상환 책임은 집단(5인)이 함께 책임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덮어놓고 돈만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공동 책임이라는 방식이 주는 유대와 긴장감을 통해 구성원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형성되도록 한 것이다.

자조·연대기금은 단순한 돈뭉치가 아니다. 어려운 가운데 각자 힘들게 번 돈을 모아 기금을 만들면 공동체 식구들 사이에 책임감과 동료애가 높아진다. 소중하게 만든 돈이니만큼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생각, 다른 구성원들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된다는 의식, 기금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터득한 경험과 지혜가 축적되어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 만들어진다.

미국의 저소득층 밀집 지역에서 일하는 지역밀착 금융기관들(CDFIs)의 고객은 신용점수가 바닥인 사람들이 대다수다. 주류 금융회사들이 애지중지하는 신용평가 방식으로 보면, 절대로 돈을 빌려주어서는 안 되는 이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회수율은 경이로운 수준이다. 이유가 뭘까? 집단지성에 의한 공동체 의식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소중하면 아끼게 되고, 잘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긴다.

금융은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해치는 흉기가 될 수도 있고 우리의 삶을 지켜주는 방패가 될 수도 있다. 정치가 싫다고 외면하면 시민들의 삶이 위험해지듯, 금융이 어렵다고 멀리하면 돈에 끌려다니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자조 금융이 필요한 이유다. 파란 약을 먹을지, 빨간 약을 먹을지의 선택은 공동체와 구성원들의 몫이다.

문진수 사회적금융연구원장
진실을 후원해주세요
용기를 가지고 끈질기게 기사를 쓰겠습니다.
여러분의 후원이 우리 사회에 드리운 어둠을 거둡니다.
한겨레에서 보기: 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1016253.html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사회성과연계채권’을 활용하자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언스플래쉬 ‘사회성과연계채권’(social impact bond, SIB)이란 비용이 많이 들고 다루기 힘든 사회문제를 정부, 민간기업, 비영리단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협력해 해결하는 성과 기반 보상 ...

  • HERI
  • 2022.01.17
  • 조회수 25

[아침햇발] 8년 숙원 사회적 경제 기본법, 이번엔 마침표 찍자

‘사회적 경제 기본법’ 제정이 차일피일 미뤄지자 이 법 제정을 열망하는 사회적 경제 단체와 사회적 경제인들이 ‘시민행동’을 결성하는 등 수년간 입법 청원 활동을 벌였다. 사진은 ‘시민행동’에 참여한 사회적 경제인들이...

  • HERI
  • 2022.01.07
  • 조회수 107

기업의 ‘임팩트 워싱’ 우려된다고? ‘임팩트’ 평가기준부터!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산출·성과보다 목표 실현하는 ‘임팩트’ 중요 임팩트 측정 어떻게 할 것인가는 향후 과제 국내·외 사회적 가치, ESG 측정법 많지만 ‘임팩트 워싱’ 현상 일어나지 않으려면 정부가 올바른 방...

  • HERI
  • 2022.01.03
  • 조회수 69

[유레카] ‘거수기 이사회’ 종언 판결 / 곽정수

법률전문매체인 <법률신문>이 선정한 ‘2021년 주요 판결’ 중에서 기업 담합행위에 대해 이사의 책임을 잇달아 인정한 대법원과 고등법원의 판결이 당당히(?) 1위에 올랐다. 대법원은 지난해 11월 유니온스틸(현 동국제강)의 소액주...

  • HERI
  • 2022.01.03
  • 조회수 99

[유레카] 현실이 된 5년 전 ‘미래 예측’ / 구본권

“2022년이 되면 선진국 대부분의 시민들은 진짜 정보보다 거짓 정보를 더 많이 이용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컨설팅업체 가트너가 2017년 10월 발표한 ‘미래 전망 보고서’의 한 대목이다. 미래 예측은 해당 시점에서 대부분...

  • HERI
  • 2022.01.03
  • 조회수 84

자치의 힘을 믿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자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지방자치 의제는 중앙 집권식 공약이 아닌 지역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정책 설계 필요 언스플래쉬 선거철이다. 후보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표를 달라고 호소한다. 정책들이 쏟아진다. 하지만 ...

  • HERI
  • 2021.12.17
  • 조회수 354

[유레카] 재벌의 ‘윤석열 공포증’ / 곽정수

요즘 기업인을 만나면 대선 후보에 대한 재계 시각을 물어본다. “그냥 납작 엎드려 있다”는 의례적 답변이 많다. 구설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보신성’ 대응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친분이 있는 기업인들은 조심스레 “윤석열...

  • HERI
  • 2021.12.13
  • 조회수 394

“실명만” “복수계정 추천” 페북·인스타 ‘따로 또 같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최근 페이스북에서 이름을 바꾼 ‘메타플랫폼’ 소속의 사회관계망 서비스다. 두 서비스는 계정을 서로 연동할 수 있는 한울타리 안의 소셜미디어로, 메타플랫폼의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가 지휘한다는 ...

  • HERI
  • 2021.12.13
  • 조회수 204

[유레카] 메타버스 환경과 ‘인공지능 정치인’ / 구본권

정치에 대한 불만과 불신으로 인해 정치인은 인공지능(AI)으로 가장 대체하고 싶은 직업군으로 꼽힌다. 하지만 정치인은 인공지능 시대에 사라지지 않을 최후의 직업일 것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국회에서 절대로 자신들의 직업을...

  • HERI
  • 2021.12.13
  • 조회수 145

[아침햇발] 대통령 혼자 유능할 수 없다 / 이봉현

문재인 정부는 30여 차례의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으나 집값을 잡지 못했고, 이는 민주당을 지지했던 많은 국민이 등을 돌리는 이유가 됐다. 사진은 2018년 9월13일 당시 김동연 경제부총리(가운데)와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왼...

  • HERI
  • 2021.12.08
  • 조회수 178

사회투자 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역할

사회적 금융 원금 회수 원칙으로 사회가치 창출이라는 기금 취지 훼손 손실 문제 해결은 정책의 영역 사회혁신 조직에 돈이 흐르도록 정부는 사회투자 촉매자 역할해야 언스플래쉬 “ 빌려준 돈은 반드시 회수해야 한다. ” 대...

  • HERI
  • 2021.12.02
  • 조회수 215

[유레카] 재벌의 ‘아빠 찬스’ / 곽정수

대선 출마를 선언한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가 최근 우리나라가 ‘청년층의 무덤’으로 전락했는데 여야 대선 후보들은 나랏빚으로 환심을 사겠다는 무책임한 대책만 내놓는다고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올해 상반기 청년층(15~29살)의 ...

  • HERI
  • 2021.11.25
  • 조회수 395

[유레카] 프롬프터와 소크라테스 / 구본권

말할 때 눈앞에서 내용을 띄워주는 프롬프터(자막 노출기)는 현대 정치의 핵심 도구다. 일상화한 도구는 부재 시 존재감이 드러난다. 2014년 4월 한-미 정상회담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미국 기자의 질문에...

  • HERI
  • 2021.11.24
  • 조회수 420

수익 잔치 은행은 ‘생산적 금융’했나?…시민이 대안금융 열자

임팩트 투자 플랫폼, 사회의 미래에 투자하는 문화 조성 사회 가치 창출하는 프로젝트·사업에 돈의 흐름 이어줘 임팩트투자 플랫폼 비플러스 누리집(benefitplus.kr) “내 돈이 지구 환경을 지키는 데 쓰였다니 기쁘네요.” 온라인...

  • HERI
  • 2021.11.22
  • 조회수 235

“평생기술일 줄 알았는데…” 카센터 사장님의 ‘투잡’

인공지능과 자동화 시대에 안정적인 일자리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무어의 법칙’은 디지털 세상의 속도와 변화의 폭을 규정한다. 약 24개월마다 반도체의 집적도가 2배가 된다는 이 법칙은 기술 발전의 속도가 지수함수라...

  • HERI
  • 2021.11.15
  • 조회수 470

지역에 사회적 금융 전문 중개기관을 만들자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지역에 사회적 금융 중개기관 설치해 사회 가치 실현하는 기업과 사업에 투자한다면 지역 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지역 밀착 금융 기관으로 발돋움 할 수 있어 수도권은 진공청소기처럼 사람과 돈...

  • HERI
  • 2021.11.05
  • 조회수 647

[아침햇발] 산업화·민주화·탈탄소화 / 이봉현

문재인 대통령이 2일(현지시각) 영국 글래스고 스코틀랜드 이벤트 캠퍼스(SEC)에서 열린 국제메탄서약 출범식에 참석,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이봉현|경제사회연구원장, 논설위원 대한민국은 ‘네다바...

  • HERI
  • 2021.11.05
  • 조회수 329

[유레카] 최태원과 기업가정신 / 곽정수

에스케이(SK)에서는 지난 10월 말 올해를 마무리하는 시이오(CEO) 세미나가 끝난 뒤 격론이 벌어졌다. 최태원 회장이 폐막 연설에 ‘2030년 기준 전세계 탄소 감축 목표량 210억톤 가운데 1%인 2억톤을 기여하겠다’는 약속을 ...

  • HERI
  • 2021.11.04
  • 조회수 472

[유레카] 항공기 사고와 소프트웨어 사고 / 구본권

1983년 9월26일 밤 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소련 핵전쟁 관제센터에 경보가 울렸다. 미국으로부터 소련 본토로 5기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날아오고 있다는 경보였다. 핵탄두 탑재 전폭기를 24시간 공중 체류시키며 즉각적인 ‘상호확...

  • HERI
  • 2021.11.03
  • 조회수 309

자조 금융이 만들어내는 집단지성의 힘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미국 뉴욕시 저소득층 거주지역의 지역밀착신협(CDCU) 활동을 소개하는 누리집(lespeoples.org) ‘보조금 24’라는 누리집이 있다. 국가가 제공하는 각종 지원금을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든 온라...

  • admin
  • 2021.10.26
  • 조회수 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