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신용정보 낮은 청년, 매출실적 낮은 성장 잠재력 있는 기업은
기존 금융에서 금융 서비스 이용 어려워 도약 어려운 악순환

지역에 뿌리내리고 정성적 정보 종합판단하는 관계금융 절실
지역밀착 공공은행은 지역경제 살릴 수 있는 열쇠가 될 것
연합뉴스 제공
연합뉴스 제공

급하게 돈을 융통해야 할 일이 생겼다고 하자. 은행 대출창구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당신의 신용점수를 알아보는 것이다. 만일 신용점수가 800점 아래면 은행에서 담보를 제공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은행은 평균 800점 이상, 신용등급 기준으로 3등급 이상의 고객과 거래하길 원한다.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회사도 신용등급이 있어서, 등급이 낮은 회사가 돈을 빌리려면 등급이 높은 회사보다 더 높은 이자를 부담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나라 소매금융은 등급제로 운영된다. 마치 도축한 짐승에 등급을 부여하는 것처과 같다. 누군가 우리들에게 꼬리표를 달아놓고 있다. 누가 이런 기준과 질서를 만들었을까? 은행과 신용평가사를 포함한 민간 금융회사들이다.

그렇다면 저신용자는 어디로 가야할까. 금융공급 사다리를 따라 아래로 내려갈 수 밖에 없다. 신용등급 4∼6등급은 저축은행(2금융권), 7∼10등급은 대부업체(3금융권)로 가야 한다. 그리고 두말할 필요없이, 아래로 떨어질수록 이자율도 올라간다. 현재 350만명이 넘는 저신용자들이 이 거미줄(web of debt)에 걸려 고통받고, 우리는 이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금융회사가 재무상태나 신용점수를 기준으로 금융혜택 제공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을 ‘거래형 금융’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신용점수가 낮거나 담보가 부족한 사람이나 회사는 금융의 수혜를 받지 못하는 걸까? 경제적 어려움으로 한두번 카드대출을 사용하는 바람에 신용점수가 나쁜 청년, 매출실적은 낮지만 미래 성장 잠재력이 있는 기업을 지원할 방법은 없는 걸까?

금융회사가 개인 또는 기업의 정량적·외형적 정보에만 의존하지 않고 비계량적·정성적 가능성을 토대로 금융거래를 하는 방식을 ‘관계형 금융’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거래방식이 이루어지려면 금융기관이 거래를 해도 되겠다는 판단, 다시말해 정보 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될까? 은행이 대출심사를 할 때 재무제표만 들여다보지 말고 정성적인 정보를 수집하면 된다. 기업체에 직접 방문해 공장도 살펴보고 직원들과 이야기도 나누면 된다. 거래처에 대표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볼 수도 있다.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다. 그렇다면 은행은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거래금융과 관계금융 비교
거래금융과 관계금융 비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관계형 금융을 실천할 수 있는 금융회사를 만들면 된다. 지역주민들의 살림살이 사정을 두루 알고, 축적된 정보와 경험을 바탕으로 관계금융(relationship banking) 기법을 적용하는 ‘지역밀착형 금융기구’가 그것이다. 민간 금융회사보다는 공공이 사업을 주도하거나, 공공성을 추구하는 조직에서 사업을 주도해야 한다.

세계적으로는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지역주민과 지역기업들을 대상으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크고 작은 회사와 기관들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국내 사정은 어떤가? 현재 우리나라에 이런 기법을 활용하는 금융회사는 거의 없다 해도 과장이 아니다. 서민금융기관이라 할 수 있는 신협이나 새마을금고도 좁은 공간(공동유대)에서 일하지만 관계금융을 실천하진 않는다.

지역밀착 공공은행이 생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는 토종 강소기업들에게 자금을 제공해줄 수 있다. 공익적 가치는 높지만 수익성은 높지 않은, 그래서 민간은행이 돈 빌려주기를 주저하는 사업에 공적자금을 투입할 수 있다. 수익창출보다 일자리 창출효과가 높은 영역에 인내자본을 공급함으로써 지방대를 졸업한 청년들을 고용할 수 있다. 지역경제를 살릴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

독일의 재건은행(KfW)처럼 중앙과 지방정부가 공동으로 출자·출연한 지역 공공은행을 하루빨리 만들어야 한다. 지역 기반의 금융 생태계를 조성하는 작업은 공공기관 지방이전이나 혁신도시 개발, 외부기업 유치사업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경제적 효과를 창출할 것이다.

문진수 서울신용보증재단상임이사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우리도 독일처럼…‘에너지 은행’ 정부가 나서서 만들면 어떨까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독일, ‘에너지 전담 은행’ 통해 신재생 에너지 정책 실행에 앞장 서 ‘기후악당’ 국가 선정된 한국도 은행 설립 등 적극적 전략 마련해야 독일재건은행 누리집 (www.kfw.de) 은퇴한 60대 부부가...

  • HERI
  • 2021.07.15
  • 조회수 521

내 돈에 꼬리표가 달려 있다면?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네덜란드 트리오도스·독일 지엘에스 등 고객에 투자처 묻거나 공익 창출 분야에만 투자 사회적 가치 중시하는 40개국 65개 ‘착한 은행’ 경제·사회·환경 지속가능성 고민하며 윤리적 금융 생태계...

  • HERI
  • 2021.07.01
  • 조회수 644

[유레카] 알고리즘 인식과 인간 인식의 차이 / 구본권

퇴사율은 기업 생산성과 직결되는 만큼, 기업은 채용 때 오래 근속할 직원을 선호한다. 미국의 사무기기 업체 제록스는 퇴사율을 낮추기 위해 퇴직 가능성이 높은 구직자를 알려주는 소프트웨어를 도입했다. 분석결과 통근 거리...

  • HERI
  • 2021.06.30
  • 조회수 565

[말 거는 한겨레] 왜, 이준석을 내려놨나 / 이봉현

최근 이준석의 국민의 힘 대표 당선이 갖는 의미를 분석한 한겨레 티브이 <논썰> 프로그램 화면 이봉현 ㅣ 저널리즘책무실장 (언론학 박사) 30대 당대표 이준석은 한국 정치에 돌풍을 일으켰다. ‘이준석 현상’에 주목하는 언...

  • HERI
  • 2021.06.28
  • 조회수 411

“관계금융 실현하는 지역밀착 공공은행 만들자”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신용정보 낮은 청년, 매출실적 낮은 성장 잠재력 있는 기업은 기존 금융에서 금융 서비스 이용 어려워 도약 어려운 악순환 지역에 뿌리내리고 정성적 정보 종합판단하는 관계금융 절실 지역밀착...

  • HERI
  • 2021.06.17
  • 조회수 603

“동의없는 이용자 추적 차단” 인터넷 서비스 대세될까?

애플 ‘프라이버시 강화안’ 파장 이용자 90% ‘앱 추적 차단’ 선택 “이용자식별 관뚜껑 못질한 셈” 애플 선공에 인터넷 사업모델 흔들 페이스북 ‘반발’, 구글은 ‘따라하기’ ‘초기설정’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정보주체...

  • HERI
  • 2021.06.14
  • 조회수 494

SNS ‘사진 태그’ ‘위치정보’는 해커의 ‘먹이’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 링크 스크랩 프린트 글씨 키우기 보이스 피싱을 막기 위해 홍보를 강화하고 은행 출금 때 다양한 안전장치를 거치도록 하고 있지만, 메신저 피싱은 오히려 늘고 있다. 지난해 가족·지인을 사칭한 메신저...

  • HERI
  • 2021.06.14
  • 조회수 456

[유레카] ’메타버스’의 무한성과 유한성 / 구본권

‘메타버스’는 미국의 과학소설 작가 닐 스티븐슨이 1992년 <스노 크래시>에서 ‘아바타’와 함께 처음 사용한 말인데, 최근 널리 쓰이고 있다. 초월을 의미하는 ‘메타’와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를 합성해 만든 ‘메타버스...

  • HERI
  • 2021.06.10
  • 조회수 615

“사회적 경제에 금융을 흐르게 하라”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혹독한 경제상황 속에 싹틔운 따뜻한 금융 돈이 위기 극복하고 지역 번영에 기여해야 다양한 사회적 경제 형태 품을 수 있는 금융 사회적 금융 중개기관과 도매기금 역할 중요 언스플래쉬 일반...

  • admin
  • 2021.06.03
  • 조회수 683

“정책 효과성 높이려면 공적집단의 소명의식 회복해야…”

[이재우의 산업혁신 톺아보기] 훌륭한 정책과 정부의지 높아도 실현은 난항 이익집단의 이해관계에 ‘포획’된 공적집단 합종연횡하며 정책결정이나 실행 연기되기도 실행 난항 극복하고, 실행 효과성 높이려면 경제·사회 전반 고려...

  • HERI
  • 2021.05.31
  • 조회수 653

‘사이버 인질극’이 바꿀 인터넷 구조

[유레카] 신종 인질극이 잇따르고 있다. 범인들은 인질극 몇시간 만에 수십억원의 몸값을 챙겨 흔적 없이 사라진다. 지난 7일 미국 동부지역 석유 공급의 45%를 담당하는 송유관 운영회사 콜로니얼 파이프라인은 해커 집단 ‘다...

  • HERI
  • 2021.05.24
  • 조회수 605

애플 에어태그 ‘위치추적’ 실시간 미행·스토킹 우려

애플이 4월30일 개당 3만9000원에 출시한 위치추적용 액세서리 에어태그. 애플 제공 “열쇠를 어디 뒀더라” 더이상 건망증을 탓하지 않게 만들 똑똑한 위치알리미가 등장했다. 애플은 지난달 30일 위치 추적용 소형 액세서리 ‘...

  • HERI
  • 2021.05.17
  • 조회수 694

[말 거는 한겨레] 언론 바우처, 실험해 보자 / 이봉현

의 후원 페이지. 월 10달러의 정기적인 후원을 권하고 있다. 가디언은 디지털 콘텐츠를 유료화하는 대신 질 높은 뉴스로 독자에게 만족감을 줘서 후원을 받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를 통해 100만명 이상의 후원회원을 모집했다. ...

  • HERI
  • 2021.05.10
  • 조회수 718

공유경제의 시대에 특허는 공유하면 안되나요?

[이재우의 산업혁신 톺아보기] 게티이미지뱅크 특허하면 우리는 2차 산업혁명 시대의 혁신 아이콘인 에디슨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가 백열전구, 축음기 등을 비롯해 1100여개의 특허를 가졌다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

  • HERI
  • 2021.04.29
  • 조회수 796

‘추격 시대’의 R&D 시스템, ‘추월 시대’에 맞게 새 틀 짜자

[이재우의 산업혁신 톺아보기] 우리나라의 달라진 위상에 맞게 기존 R&D 시스템의 틀을 새로 짜야 할 시점이다. 픽사베이 1970년대 아이들의 희망 직업을 물어보면 대통령 아니면 과학자였다. 그것은 아마 ‘로보트 태권V’...

  • admin
  • 2021.03.24
  • 조회수 995

노동자의 삶 보장해야 산업 구조조정이 활성화된다

[이재우의 산업혁신 톺아보기] 기업 퇴출 없는 산업혁신은 불가능하다 혁신은 항상 앞만 보고 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산업혁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새롭게 만드는 것을 중요시하고 창업을 혁신의 핵심이라고 본다. 그러나 한...

  • HERI
  • 2021.03.05
  • 조회수 1082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쿠팡은 그나마 낫다니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십수년간 프리랜서 영화감독으로 일한 후배 제이(J)가 인생 2막을 위해 선택한 직업은 쿠팡맨이었다. 입사 직후 그는 자신을 ‘로켓 제이’로 불러달라며 호기를 부렸다. 주문한 다...

  • HERI
  • 2020.06.05
  • 조회수 2894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50대의 선택, 국가의 효능감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지난 총선 더불어민주당의 180석 차지라는 압도적 승리에는 50대의 지지가 결정적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출구조사에서 50대는 더불어민주당 49.1%, 미래통합당 41.9% 지지로 밝혀,...

  • HERI
  • 2020.05.11
  • 조회수 3207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코로나 총선, 실종된 정치를 찾아서

한귀영 l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참 기묘한 선거다. 총선이 다가올수록 유권자들이 도처에서 무력감을 호소한다. 코로나19가 다른 이슈를 몽땅 집어삼킨 특수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선거 공간에서 표출되기 ...

  • HERI
  • 2020.04.10
  • 조회수 2917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공포 프레임’에 점령당한 총선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밑바닥 민심이 심상찮다. 2017년 탄핵을 지지하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투표했던 상당수가 돌아서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코로나 사태에 편승해 공포와 혐오를 부추기는 보수 야당...

  • HERI
  • 2020.03.13
  • 조회수 25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