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이재우의 산업혁신 톺아보기]
우리나라의 달라진 위상에 맞게 기존 R&D 시스템의 틀을 새로 짜야 할 시점이다. 픽사베이
우리나라의 달라진 위상에 맞게 기존 R&D 시스템의 틀을 새로 짜야 할 시점이다. 픽사베이

1970년대 아이들의 희망 직업을 물어보면 대통령 아니면 과학자였다. 그것은 아마 ‘로보트 태권V’와 ‘마징가Z’에 나오는 “김 박사”, “윤 박사”, “강 박사” 님들의 덕분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당시 과학자, 박사에 대한 동경과 존경의 분위기가 사회 전반으로 퍼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분위기 형성에는 한국인의 몸에 흐르는 앎에 대한 권력적 지향 등 문화적 특징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과학입국”이란 표현까지 사용하며 경제개발의 핵심으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한 정부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이러한 과학자에 대한 사회적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낸 한국 R&D(연구개발)의 성과는 눈부시다. 한국의 국민 1인당 논문 편수는 1981년 0.06개에서 2019년 13.43개로 증가했으며, 미국, 일본, 유럽지역에서 공동으로 획득한 국제특허 건수는 인구 백만명당 1985년 0.2개에서 2018년에는 41.9개로 증가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등의 서유럽 국가들을 능가하며 과학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이러한 과학과 기술의 역량 강화로 2020년 IMD(국제경영개발대학원) 평가 기준으로 기술경쟁력 부문에서는 13위, 과학경쟁력 부문은 3위를 기록하는 등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신화를 만든 것이다.

효율성을 강조하는 성과주의를 통해 만들어진 R&D 신화국

한국이 단기간에 과학기술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던 R&D 혁신 시스템의 핵심은 무엇인가? 첫째 정부가 중심이 되어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단기 및 중장기 로드맵을 수립하고 그에 따라 민간의 투자를 조율, 조정하여 국가적 단위에서의 R&D 투자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5년 단위의 과학기술발전계획을 1962년 제1차 기술진흥 5개년계획(1962~1966)을 시작으로 7차 경제개발계획까지 병행하여 수립했으며, 1997년 경제개발계획이 종료된 이후에도 정권별로 5년 단위의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발전전략을 추진하였다. 이와 더불어 1960년대 후반부터 15~20년 단위의 장기 로드맵인 ‘과학기술개발 중장기종합계획’을 통해 장기적 비전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민간부문이 발전하지 못한 후발자의 입장에서 선진국 과학기술을 추격하기 위한 지름길이 무엇인가를 지속해서 고민하며 효율성을 높이려 노력한 것이다.

둘째는 적극적으로 민간의 재원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민간의 역량이 확보되지 못한 경제개발 시점에서는 정부재원의 비중이 90% 수준으로 역할이 컸으나, 민간의 경제적 역량이 확대되며 1980년대에는 민간의 비중이 30% 수준으로 확대되었고 1990년대 이후에는 정부 투자규모를 추월하여 총연구비의 70~80%를 차지하며 R&D 투자를 주도하고 있다.

민간의 투자비중이 높다는 것은 R&D 투자 결정 및 수행과정이 기업의 이윤 극대화 전략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윤 극대화 전략에 따라 R&D 투자가 성공 가능성이 높은 부문에 집중되고 수행과정에서도 비용의 절감 또는 낭비의 축소 원칙이 강조되며 투자의 효율성이 높아진 것이다.

셋째는 개별 R&D 평가에서 성과주의의 강조이다. 즉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평가체계를 구축하여, R&D 생태계가 실패를 용서하지 않는 승자 중심의 정글의 법칙으로 작동하게 함으로써 투자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것이다. 민간부문에서뿐만 아니라 국책연구의 경우에도 과제에 대한 평가를 목표 도달 여부로만 하고, 성공 여부를 차기의 연구지원 결정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했다. 연구의 지속성을 위해서 연구자는 성과 도출에 전력을 다한 것이다.

결국 국가적 차원에서의 자원배분의 관리 및 효과적 연구방향의 설정과 성과주의에 기초한 R&D 생태계의 정글화를 통한 투자 효율성 제고가 한국의 R&D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성과 지상주의는 기초과학 분야 연구 및 다양성, 창의성을 고사시킨다

항상 모든 것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공존하고 있으며, 두 가지 중 어느 면이 더 강조되는가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위치에 따라 변하게 된다. 이제 한국 경제와 산업의 위상이 세계 최정상으로 변화된 상황에서도 개도국 단계에서 성공적 모델이었던 성과주의적 R&D 시스템이 유효한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봐야 한다.

성공 요인별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국가 주도적 계획 및 조정의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분명한 목표점이 있을 때 매우 효율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탑다운 시스템은 한 국가의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지향하게 함으로써 다양성을 약화하고 개인의 창발성을 축소하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문제는 글로벌 산업의 최전선에 있는 한국의 경우 이제 필요한 것은 다양성에 기반을 둔 창의적 R&D라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산업기술의 급격한 변화로 미래의 방향이 매우 불확실하고 산업간 융합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사고를 바탕으로 한 기술 및 산업간 창의적 결합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따라서 다양성을 제약하는 기존의 R&D 체계로는 세계적으로 기술과 산업을 선도할 수가 없다.

다음으로 민간 투자 중심의 R&D 방식을 평가해 보자. 기업은 이윤 극대화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투자 효율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투자 효율성을 위해 기업은 R&D를 통해 바로 상용화될 수 있는 분야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결국 민간의 투자비중이 높아질수록 국가 전제적 차원에서 기초과학 분야에 대한 투자보다도 응용분야에 대한 투자비중이 높아지는 부작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체 R&D에서 기초 연구개발비 비중이 14.7%로 프랑스(22.7%), 미국(16.6%), 영국(18.3%) 등 주요 과학기술 선진국에 비해 낮게 유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뿐만 아니라 민간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현재 경제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기업을 중심으로 R&D가 이루어지며 특정한 분야에 R&D가 편중되는 양상을 보인다. 우리나라 전체의 연구개발비 중 60% 이상이 전기, 전자, 통신 분야에 집중된 것이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낮은 기초과학 수준을 통해서는 과학 기술적 독립성을 획득할 수가 없고, 편중된 R&D로는 타부분 연구결과와의 결합 및 융합을 통한 독보적 영역의 개척이 어렵다는 것이다.

세 번째 특징인 성과주의적 시스템의 문제를 보자. 성과 달성 여부로 R&D 과정 전반을 평가하는 상황에서는 연구자들이 과제 목표를 달성 가능한 수준으로 낮추어 제시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전략이다. 그러다 보니 현재 상황에서는 달성하기 어렵지만 미래를 위해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한 분야에 대한 도전적 R&D 활동을 연구자들이 기피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효율성을 추구하는 추격의 시대의 R&D 시스템이 기초과학에 기반을 둔 창조성을 추구하는 추월과 선도의 시대에는 하나의 걸림돌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패를 용인하는 시스템이 기초과학과 창의적 R&D를 촉진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첫째,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국가적 투자를 확대하는 것이다. 민간의 장점은 시장의 수요를 잘 반영하여 효과적 R&D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장점을 활용하고 부족한 부분인 기초분야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국책연구기관 및 대학교에 대한 지원을 통해 이 분야에 대한 투자를 획기적으로 증가시켜야 한다.

둘째는 연구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실패를 용인하고, 연구에서 자율성을 확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객관적 결과물로만 모든 것을 평가하고 실패를 게으름의 결과로 보는 한국 특유의 불신 문화와 결합하여 있어 쉽게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타인에 대한 신뢰 수준은 전 세계 167개국 중 139등으로 최하위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이러한 신뢰 수준에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실패 확률이 높은 기초적이고 장기적인 과제의 수행은 불가능하다.

결국 불신 사회가 극복되어야 한다. 사회적 신뢰 수준의 개선은 사회와 타인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경험이 장기적이고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야 가능하다. 즉 사회적 포용성이 확대되어야 한다. 특히, 사회적 포용성으로 사회 자체에 대한 신뢰가 구축되면 사회구성원에 대한 신뢰, 즉 타인에 대한 신뢰로 퍼지기 때문이다. 사회적 포용성의 중요성은 덴마크, 노르웨이 등 사회안전망과 복지 수준이 높은 북유럽 국가들의 사회적 신뢰도가 높은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R&D의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한 시점에 도달해 있다. 사회적 신뢰를 바탕으로 연구자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모습으로 ‘70년의 박사님’처럼 사회적으로 동경과 존경을 받을 때 또 다른 도약이 시작될 것이다.

이재우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산업경제팀장


한겨레에서 보기: ‘추격 시대’의 R&D 시스템, ‘추월 시대’에 맞게 새 틀 짜자 : 경제일반 : 경제 : 뉴스 : 한겨레 (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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