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러시아 혁명>이라는 절판된 책을 대중이 읽기 쉽게 인터넷에 올렸다는 이유로 사람이 잡혀갔다. 러시아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 벽두에 벌어진 일이다. 참으로 유별난 기념 방식이다.

잡혀간 철도노동자 이진영씨가 위반한 것은 국가보안법이라고 한다.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영국의 역사학자가 쓴 <러시아혁명>이 이적표현물이기 때문이란다. 좀 헷갈린다. 검찰과 법원의 판단에 따르면 이 책이 이롭게 하는 ‘적’이 현존한다는 것인데, 그게 누구일까? 이른바 ‘운동권’ 내에서도 러시아혁명이 ‘죽은 개’ 취급을 받고 있는 마당이다. 역설적이게도 검찰의 이씨 기소, 그리고 짜맞춘 듯한 법원의 구속영장 발부는 이런 분위기에 경종을 울리는 것 같다. ‘이 친구들아, 러시아혁명은 살아 있어!’

오늘 돌이켜보고 또 부분적으로는 되살려야 할 혁명의 유산은 한둘이 아니겠지만, 노인정책도 분명 그중 하나다. 영국 런던 킹스칼리지의 현대사 교수 팻 테인이 ‘노년’에 대한 역사적 고찰 끝에 말했듯, “20세기에는…늙는다는 것이 역사상 처음으로 정상적인 것이 되었다”(<노년의 역사>, 팻 테인 엮음, 안병직 옮김, 글항아리, 2012, 401쪽). 즉 늘어나는 노년인구를 사회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은 20세기 고유의 문제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에 똑같이 제기되었다.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이 일련의 사회입법을 통해 노인들에게 국민연금을 제공하는 쪽으로 나아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연금액은 인간다운 삶을 이어나가기에 충분치 않기 일쑤였고, 국가재정 갉아먹는 ‘연금수급자’라는 굴레를 노인들에게 덧씌웠다. 최근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 복지국가의 관료주의를 꼬집기도 했다. 1982년 출간된 <자본주의와 노년의 구성>이라는 책은 “노년의 불평등과 억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정책과 사회복지의 근본적인 결점을 상징한다”고 결론짓기도 했다.

반면 테인에 따르면, “다른 나라에서와는 달리 소련에서는 1930년대에 이르면 ‘연금생활자’는 존경할 만한 신분으로서, 의존보다는 연륜과 연장자의 특권을 의미했다. 사회보장제도는 사람들이 최대한 늙어서까지 일하는 것을 고무하도록 계획되었다”(<노년의 역사>, 416쪽). 그렇다고 이것이 소련의 노령자들이 서구의 노령자들보다 생활조건이 반드시 나았다는 뜻은 아니다. 비판적으로 보면, 당국의 연금지급능력 부족도 위와 같은 정책의 한 원인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노동의 가치를 앞세웠던 소련에서 노령 노동자들이 다름아닌 ‘노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나아가 자아를 계발하도록 고무되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사실 노년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인구의 노령화 진전에 발맞춰 최근 국제노동기구(ILO) 등에서 장려되고 있기도 하다.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노동 관련 통계의 대상 연령 폭이 넓어지고 있으며 퇴직연금 수급 연령이 늦춰지고 있다. 현실적으로 이것은 정부의 재정적자 누적에 의해 강제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이 과정에 의의를 부여하고 그런 의의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국가정책을 견인하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소련을 포함한 지난 세기 사회주의의 경험은 이를 위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자원이다. 그러니 진짜 이적행위는 러시아혁명과 그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이제 100년이나 되었으니 불필요한 두려움은 떨쳐내도 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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