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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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한겨레경제연구소장


‘20대들아, 대한민국의 미래는 필리핀이다.’ 5년 전 서울대생이 교내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린 글이 최근 온라인에서 화제가 됐다.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심각한 양극화가 가져올 암울한 미래 예측을 담고 있다. 그는 현재의 취업난과 저출산은 상위 1%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한 20대의 몸부림이라고 주장했다. 고소득 직업을 갖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쓰고, 결혼과 출산도 미루거나 포기한다. 상위 1%에 들지 않으면 차라리 일을 하지 않겠다는 ‘니트족’도 많아질 거라 내다봤다. 이런 과도기를 거쳐 결국에는 경제발전의 과실은 상위 1%가 독점하고 치안불안 등 위험은 나머지가 모두 떠안게 된다. 논리의 타당성을 떠나 많은 학생들이 우리 사회가 처한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꽤 있다고 공감했다. 커뮤니티 게시판 조회수는 7000을 훌쩍 넘었고, 추천이 비추천보다 5배가량 많았다.

외교부와 코트라 자료만 살펴봐도 오늘날 필리핀은 극소수 대기업과 부자들의 나라다. 필리핀의 15대 가문이 전체 국부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오랫동안 재벌구조를 형성해 정경유착으로 부를 쌓고 유지해왔다. 아얄라, 로페스, 헨리, 탄 등의 재벌들은 전기, 통신, 금융 등 주요 기간산업을 거머쥐고 있다.

이에 비해 필리핀 국민 3명 중 1명은 하루 2달러로 생활하는 빈곤층이다. 국민의 절반 이상은 스스로를 빈곤층이라고 여기고 있다. 월평균 임금은 고작 1000페소(약 25만원)가량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먹고사는 것 자체가 해결이 안 되는 구조에서 사람들은 일할 의욕을 잃는다. 소득불평등이 심각한 사회가 어떤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청년들이 극단적 양극화 사회인 필리핀을 우리의 미래 모습과 대비시킬 정도로 소득불평등 문제는 더이상 방치할 수 없는 뜨거운 감자다. 지난주 한국을 찾은 데이비드 립턴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부총재도 “한국은 소득불평등이 점점 커져 중산층이 줄어들고 있다”며 “소득 재분배 정책으로 이들을 재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립턴 부총재는 1997년 외환위기 때 미국 재무차관으로 구제금융 계획을 진두진휘해 한국과 인연이 있다. 당시 성장 중심의 정책을 몰아붙였던 그가 분배를 강조하는 것은 시대의 화두가 달라졌다는 방증이다.

그렇다면 소득 재분배 정책을 어떻게 재설계해야 할까. 최근 국책연구소인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내놓은 보고서에 실마리가 될 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적게 걷어 적게 분배하는’ 저부담·저복지의 재정구조를 개선하려면 증세 못지않게 ‘조세체계의 공평성’, ‘공공자원 분배의 효율성’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재벌 대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법인세 감면이나 고소득층과 고액자산가가 누리는 비과세·감면 혜택을 줄이고, 토건·경제사업·국방비 등에 지나치게 집중된 재정지출 구조만 고쳐도 소득 재분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보편주의 복지로 소득불평등이 줄면 생산성이 나아지고 고용이 늘어, 세수기반 확충으로 이어져 국가 재정건전성에도 기여할 수 있다.

연초 연말정산 파동을 거치면서 증세 논란이 본격화하고 있다.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며, 복지를 축소하느냐, 아니면 증세를 해서라도 현재 복지수준을 유지하거나 늘려야 하느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법인세 인상을 포함해 부자증세를 하지 않으려 복지를 축소한다면 정부의 소득 재분배 정책 의지는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소득 재분배 정책이 실패할 경우 필리핀이 우리의 미래가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이현숙 한겨레경제연구소장 hslee@hani.co.kr                                등록 : 2015.02.08 18:55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7738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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