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성의 딜레마] ① 여론조사와 20~30대 심층 인터뷰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한국 사회에서 ‘공정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묻는 계기가 됐다. 공공운수노조 인천공항지역지부 조합원들이 지난해 12월26일 인천공항공사에서 정규직 전환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인천/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한국 사회에서 ‘공정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묻는 계기가 됐다. 공공운수노조 인천공항지역지부 조합원들이 지난해 12월26일 인천공항공사에서 정규직 전환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인천/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걸 안다. 그나마 평범한 사람에게 남은 좋은 자리가 대기업과 공기업인데, 시험마저 없으면 내가 될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김정현(30)씨가 이렇게 말했다. 그는 평창겨울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을 두고도 “취업준비생 처지에서 보자면, 열심히 준비해서 최종면접에 올라갔는데 ‘회사에 도움이 되고 면접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이유로 갑자기 면접자가 늘어난 것과 다름없다. 나도 모르게 남한 선수들과 동일시가 된다”고 했다. 정규직 취업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되면서 20~30대가 느끼는 박탈감의 바탕에는, 형식적인 공정성이라도 지켜져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얘기였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둘러싼 의견을 살펴보면, 지금 한국 사회가 공정성에 얼마나 민감한지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글로벌리서치와 함께 전국 19~59살 남녀 2천명을 상대로 지난달 23~27일 실시한 온라인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81%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하는 일이 동일하다면 비정규직 차별을 없애고 정규직과 동일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신뢰수준 95%, 표본오차 ±2.2%포인트). 하지만 ‘어렵게 취업을 준비해 정규직으로 입사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비정규직의 차등 대우는 불가피하다’는 데 동의한 사람도 61.3%나 됐다. 비정규직을 줄이고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는 당위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현재 일자리 또는 원하는 일자리를 위협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느낀 결과로 풀이된다.

정규직 전환 81% 공감하지만 
“비정규직 차등 불가피” 61%
“먼저 들어갔다고 정규직화해주면
정규직 되려 쏟은 내 ‘투자’는 누가 보상해주나”

■ ‘밥그릇’을 지키는 공정함

<한겨레>는 문재인 정부의 핵심 지지층이자, 공정성 논란에 불을 댕긴 것으로 평가받는 20~30대 6명을 심층 인터뷰해 이들의 생각을 좀 더 깊이 들어봤다. 구희준씨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얘길 들으면 ‘밥그릇’을 침범당하는 기분이 드는 것 같다”며 “정규직은 일종의 기득권층인데, (그에 걸맞은 노력도 안 한) 비정규직이 뭔데 나랑 똑같은 위치에 오려고 하고 똑같은 대우를 바라는 거냐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했다.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대학원생 박지윤(가명·28)씨는 “나는 공무원시험 붙으려고 한 학기에 500만원씩 대출받아 어렵게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데, (공기업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주는 걸 보면 내가 뭐 하러 이러고 있나 싶다. 비정규직 차별은 없애야 하지만, 먼저 들어갔다고 정규직화해주면 내 시간과 투자는 누가 보상해주느냐”고 반문했다. 조수민(30·창업준비중)씨는 “정규직으로 갈 문 자체는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열려 있다. 모두에게 시험 볼 기회가 다 있는데 비정규직을 선택한 거니까 차등조건은 있어야 된다”고 했다.

“‘평창 단일팀’ 구성 불공정” 74.4%
“북 선수들 무임승차시켜주는 기분”

남북 단일팀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전과 달리 싸늘한 이유도 공정성이다. 앞의 여론조사에서 단일팀 구성이 ‘선수들에게 피해를 주는 불공정한 일’이라는 답은 74.4%에 이르렀다. 특히 20대와 30대의 불공정하다는 의견은 각각 76%와 74.9%로 다른 세대보다 높았다. 반면 ‘단일팀 구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답은 39%에 불과했다.

취업준비생인 구희준(가명·33)씨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했는데, 단일팀 구성은 그것과 완전히 배치된다. 문 대통령에게 좀 실망했다”고 했다. 김정현씨는 “스포츠 정신은 페어플레이인데, (가장 큰 스포츠 이벤트인) 올림픽에 북한 선수들을 무임승차시켜주는 기분”이라고 했다. ‘출전 자격이 없는 북한 선수들 때문에 올림픽만 보고 달려온 남한 선수들의 기회가 박탈됐다. 취업 바늘구멍을 뚫으려 발버둥 치고, 연줄로 특혜채용되는 이들에게 밀리는 청년들의 모습과 선수들의 상황이 똑같다’는 것이다.

같은 여론조사에서 최저임금 인상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는 61.6%로, 가상통화 규제(39.8%)나 부동산 정책(31.8%), 단일팀 구성보다 두 배 가까이 호의적이었다. 노동에 ‘제값’을 매겨야 한다는 인식과 함께, 건물주나 프랜차이즈 본사가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 한다는 반감이 더해진 결과로 보인다. 대학원생 김병민(24)씨는 “최저임금 인상이 문제가 아니라, 최저임금 자체가 다수 노동자의 임금 수준인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조수민씨는 “최저임금이 작년과 재작년에 500원씩 올랐고, 올해 1천원 정도 올랐다. 어차피 오를 걸 1년 앞당긴 건데 그걸 못 견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으냐”며 “최저임금을 불공정한 사회의 약자인,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자영업자와 아르바이트생의 싸움으로 몰고 가면서 진짜 문제인 건물주와 프랜차이즈 본사는 빠져 있다. 공정한 사회가 되려면 최저임금을 내릴 게 아니라, 강자인 건물주와 프랜차이즈 본사가 사회적 협력 차원에서 월세를 내리고 가맹비를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 반대 글. 공정성을 반대 이유로 든 이 글에는 4일 현재 5만7천여명이 찬성했다. 누리집 갈무리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 반대 글. 공정성을 반대 이유로 든 이 글에는 4일 현재 5만7천여명이 찬성했다. 누리집 갈무리
■ 어차피 불공정한 세상의 공정한 시험

흥미로운 대목은 이들이 ‘공정함’을 ‘시험’과 결부해 생각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걸 안다”는 김정현씨의 설명은 이렇다. “금수저, 흙수저 얘기하는 것처럼 이미 나보다 좋은 조건에서 출발하는 사람이 많고, 이들에겐 좋은 보상이 준비돼 있다. 그나마 평범한 사람에게 남은 좋은 자리가 대기업과 공기업인데, 그 수가 너무 제한돼 있어 절차라도 공평해 보여야 한다.” 애당초 사회가 불공정해 보통 사람들에겐 안정적인 삶을 ‘획득’할 기회가 극히 적으므로, 이 기회를 두고 경쟁하는 이들의 규칙은 시험처럼 철저히 투명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비정규직도 시험 봐서 정규직 전환하라’거나 ‘북한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들은 출전 자격을 얻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이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층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형식의 공정함과 개인의 책임을 강조할 뿐, 불공정한 사회구조 자체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모두에게 시험 볼 기회 다 있는데…”
사회구조 대신 ‘형식적 공정함’에 민감한 결과
소통 없고 개인 무시하는 대의 추구도 “불공정”

공정함과 관련된 또 다른 열쇳말은 ‘소통’이었다. 이은주(26·회사원)씨는 “남북 단일팀이라고 해서 국민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하는 게 옳은 일이냐. 남북 대화를 하자면서 정작 중요한 국민과 대화는 안 해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말했다. 김병민씨는 “단일팀 자체엔 찬성하지만, ‘정부가 하라면 해야지 말이 많으냐’는 식으로 일방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보인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가상통화 규제나 최저임금 인상 등도 찬반 의견과 무관하게, 관련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지 않고 성급하게 시도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누구나 공평하게 충분한 정보를 갖고 그것에 바탕을 두고 의견을 내어 관철시킬 수 있어야 공정한데, 정부가 이 소통 과정을 생략하거나 경시해 불공정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런 시각은 ‘개인을 희생시킬 수 있는 대의명분은 없다’는 판단으로 이어졌다. 구희준씨는 “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건,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정치와 사람은 여전히 구태의연함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보여준다”고 말했다. 김정현씨는 “현정화 선수가 탁구 단일팀으로 출전한 1991년은 ‘상위의 가치’라는 게 있어서 개인이 그것에 희생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의 무게는 동등하고 그걸 존중하는 게 민주주의”라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앞으로 한국 사회가 더 공정해질 것이라고 낙관했다. 대체로 촛불이 이끈 정권교체의 경험이 그 근거였다. 박지윤씨는 “10년 동안 암흑 속에 살았지만 지금은 정부가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니 나쁘지 않다. 이번을 시작으로 다음 정부도, 그다음 정부도 국민이 합심해서 좋은 정부를 만들면 세상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본다”고 했다. 이은주씨는 “정유라 사태가 터졌을 때 학생뿐만 아니라 모두가 분노했다. 돈도 실력이라는 말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에 반기를 들게 된 것”이라며 “공정성을 자기 문제로 여기면서 의식 자체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 느리겠지만 좀 더 공정한 사회로 나아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혜정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 수석연구원 zest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