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사회
[더 나은 사회] 입주자들이 말하는 서울 지원주택

독립 거주공간과 지원서비스 결합한
노숙인·장애인 지원주택 시범사업
1년여 만에 입주민들 긍정적 변화

노숙인 출신 홍씨, 수급자 벗어나고
발달장애 이씨, ‘내 공간’ 꾸미기 즐겨
“자유로운 일상생활”에 만족도 높아

알코올 의존 노숙인 지원주택에 사는 홍기훈씨가 낮에 직장에서 배운 비누 만들기를 퇴근 뒤 연습하고 있다.
알코올 의존 노숙인 지원주택에 사는 홍기훈씨가 낮에 직장에서 배운 비누 만들기를 퇴근 뒤 연습하고 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편히 쉬는 것,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 나의 하루를 어떻게 꾸려갈지 스스로 결정하는 것. 너무 당연한 일상이라 ‘그게 뭐?’ 싶기도 하지만, 시설 생활을 하는 노숙인이나 장애인에겐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다. 잠잘 곳, 먹을 것이 해결되긴 하지만 그 속에 ‘선택지’는 많지 않다.

지원주택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주거복지제도 가운데 하나다. 취약계층에게 독립적인 주거공간을 제공하되, 이들이 지역사회에서 생활할 때 필요한 사회적·심리적·물리적 서비스도 함께 지원한다. 독일,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이미 여러 나라에서 지역사회와 결합한 다양한 형태의 노숙인·장애인 지원주택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선 서울시가 서울주택도시공사(SH)와 함께 2016년 말부터 지원주택 시범사업을 실시해 현재 정신질환 여성 노숙인, 알코올의존 남성 노숙인, 발달장애인 51명이 지원주택 네 곳에 입주해있다. 서울주택도시공사가 보유한 공동주택을, 입주자가 지원기관을 통해 임대해 최장 20년 동안 살 수 있는 ‘내 집’이다. 지원주택엔 사례관리자(사회복지사)가 출퇴근하면서 이들의 자립과 정착을 돕는다. 민간단체의 기금으로 마련해 운영되는 지원주택도 있다.

지원주택에서 1년여 생활한 이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는 “독립해 살아보니 자유로워서 좋다”다. 북가좌동의 여성 노숙인 지원주택에 사는 안윤희(가명·60)씨는 “텔레비전도 마음대로 보고,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좋다. 더 바랄 게 없다”고 했다. 신정동 발달장애인 지원주택에서 만난 박윤하(가명·21)씨도 “엄마(시설에 상주하는 사회복지사) 눈치 안 보고 늦게까지 게임도 하고 늦잠도 잘 수 있어서 좋다. 밥 해먹는 게 좀 불편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미래에 압박감도 느끼지만 이런 게 독립이구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자유로움’이 어떤 것인지 다른 입주자들의 이야기도 들어봤다.

발달장애인 지원주택에 사는 박윤하(가명)씨가 방에서 책을 읽고 있다.
발달장애인 지원주택에 사는 박윤하(가명)씨가 방에서 책을 읽고 있다.

■ ‘지킬 것’이 생기면 ‘꿈’이 생긴다 “(비전트레이닝)센터에서 나올 때만 해도 제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자유롭고 마음이 편해지니까 그 전엔 생각할 수 없던 걸 생각할 수 있게 돼요. 열심히 살아서 지금보다 더 좋게 변해서 경제적으로나 인간 자체로나 일반인들 이상 가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15일 저녁, ‘지원주택에서 지내보니 어떠냐’고 묻자 홍기훈(42)씨의 표정에 뿌듯함이 흘렀다. 홍씨는 식당 주방에서 8년 동안 일하며 모은 돈을 친구한테 사기당한 뒤 2008년 거리생활을 시작했다. 먹고 자는 것도 식당에서 해결할 정도로 고된 생활을 술로 달래곤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음주를 통제하기가 힘들었고, 노숙을 하면서는 상태가 더 나빠졌다. 노숙인 지원단체의 소개로 간간이 엑스트라로 일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만두게 되면서 2013년 서울시립 노숙인 재활시설인 비전트레이닝센터에 입소했다. 센터에서도 알코올의존은 나아지지 않아, 다른 입소자나 자활을 위해 나간 직장 동료한테 불만이 생기면 술을 마셔 퇴소했다 재입소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다 센터 사회복지사들의 권유로 지난해 1월 서울 마천동의 지원주택에 입주하게 됐다. 20㎡(6평) 남짓 되는 원룸 보증금 300만원은 이랜드복지재단의 지원을 받았고, ‘집주인’인 서울주택도시공사에 내는 월세 14만1700원은 당시 기초생활보장 대상자라 주거급여로 해결했다. 이 5층짜리 원룸형 빌라 전체가 지원주택으로, 홍씨를 비롯한 입주자 19명이 모두 알코올의존 문제가 있는 노숙인 출신이다.

사회복지사가 출퇴근하며 이들의 적응을 돕고 있지만, 지원주택은 엄연한 ‘내 집’이다. 그래서 시설처럼 금주 규정이나 생활 프로그램 등의 제약이 없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런 조건 아래 모여 있다 보니, 초반엔 술로 인한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 5월엔 장기음주로 한 입주자가 숨지기도 했다. 홍씨도 처음엔 쓰러질 때까지 술을 마시다 잠들고 일어나선 다시 술 마시는 날이 며칠씩 이어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 집은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싶은 거 해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씻고 싶을 때 씻을 수 있는 자유를 이 집에서 누리게 됐다. 시설에서 공동 생활할 땐 마음 안 맞는 사람도 있고 불편했는데 지금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내 문제는 내가 잘 아니까 고쳐가면서, 알코올 의존은 죽을 때까지 가는 병이라 생각하고 하루하루 긴장하면서 살아보자.”

홍씨는 8월부터 자활사업단에 나가 택배 기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물건을 받는 손님들한테 술 냄새 풍기는 게 싫어 출근하는 평일엔 술도 안 마셨다. 그렇게 일해 매달 월급 80여만원을 받으면서 기초생활보장 대상자에서 벗어났다. 월세와 각종 공과금, 차비 등을 빼고 남은 생활비 40여만원을 아껴 모아 10월엔 32인치짜리 텔레비전도 샀다. 텔레비전을 사던 날은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이달 초부터 홍씨는 자활사업단에 새로 생긴 비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다. 출근해 비누 만드는 법을 배우고, 퇴근 뒤 꼬박꼬박 복습해 손에 익힌다. 일이 재밌기도 하지만 “이렇게 먹고살게 해준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에게 고맙고, 다시 센터로 재입소하고 싶지 않아서”가 더 큰 이유다.

알코올 의존 노숙인 지원주택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홍종현(가명)씨.
알코올 의존 노숙인 지원주택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홍종현(가명)씨.

‘내 공간’의 마법은 다른 입주자들한테서도 발견된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홍종현(가명·46)씨는 “내 집이 생겨 자유로워지니 인간관계에서 받는 괴로움이 훨씬 덜하다. 지금처럼 약 잘 챙겨먹고 음주 관리도 잘 하면, 봄엔 일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며 “세금 내는 일을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내 공간’이 곧 ‘자립’ ‘자기만의 방’은 혼자 일상생활이 불편한 중증장애인한테도 변화를 불러왔다. 지적장애 2급인 이민하(가명·65)씨는 2006년 12월 신정동의 발달장애인 지원주택에 입주했다. 투룸 빌라의 다섯 집에 두 명씩, 10명이 사는 곳인데 이씨는 이곳에 오기 전 3년 동안 살던 체험홈(중증장애인이 자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생활 경험과 기술 등을 배우며 거주할 수 있는 주택) 룸메이트와 함께 산다. 옆집엔 여자친구 안지영(가명·43)씨도 입주해있어, 볼펜이나 문구류 등을 포장하는 회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같이 커피도 마시고 손전화로 음악을 듣거나 게임도 한다. “지영이, 지영이 많이 좋아요. ‘오빠, 밥 사주세요’, ‘오빠, 빨리 와’ 해서 좋아요” 하며 이씨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씨는 자신의 방과 거실에 안씨와 놀러가서 찍은 사진도 여러 장 붙여놨다.

그가 퇴근 뒤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자기 방을 취향껏 꾸미는 소소한 일상이 곧 자립이다. 이씨의 생활을 돕고 있는 생활재활교사 이형래씨는 “시설에서는 누가 밖에 나가고 싶다고 해도 다른 입소인들이나 생활재활교사들의 상황에 맞춰야 하지만 지원주택에선 그렇지 않다”며 “지원주택 생활 몇 달 만에 입주민들한테 취미와 욕구가 생겼다. 유튜브를 찾아보고, 먹고 싶은 걸 사먹는 것, 그렇게 ‘선택’이라는 걸 하는 것 자체가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씨는 ‘시설에 다시 들어갈 생각 없냐’는 질문에 강하게 도리질을 쳤다.

발달장애인 지원주택 입주자인 이민하(가명)씨가 자신의 방에 장식해둔 사진들. 옆집에 사는 여자친구와 찍은 것들이다.
발달장애인 지원주택 입주자인 이민하(가명)씨가 자신의 방에 장식해둔 사진들. 옆집에 사는 여자친구와 찍은 것들이다.

이씨는 현재 장애인 시설인 누림홈 소속이어서 집 보증금과 월세, 식품·생필품 구입비 등은 시설 수급비로 충당한다. 매달 나오는 장애인연금·장애수당 23만여원과 월급 5만~6만원이 이씨의 용돈이다. 숫자 개념이 없어 용돈은 생활재활교사가 보름에 한 번씩 통장에 넣어주고, 이씨는 체크카드를 사용한다. 쓰레기 분리수거나 음식 골고루 먹기처럼 난이도 높은 일도 생활재활교사가 도와야 하고, 가끔은 출퇴근하다 길을 잃을 때도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자립 생활을 유지하지 못한다거나,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씨와 다른 지원주택 입주자들을 1년여 지켜봐온 이형래씨는 이렇게 말했다. “장애인이니까 도와줘야 할 게 있지만, 그건 우리가 아니어도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장애인이라도 자기만의 공간에서 사생활을 유지하고, 무언가 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고, 그걸 주체적이고 자유롭게 해소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

글·사진 조혜정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 수석연구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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