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네덜란드 연립정부가 생물 다양성을 위협하는 질소 방출을 줄이기 위해 기축 수의 3분의 1을 줄이고 수천개 농장을 폐쇄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지난해 7월 “농민이 없으면 식량도 없다”는 펼침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이런 농민시위 과정에서 창당된 신생 ‘농민시민운동당’(BBB)은 올 3월 치러진 네덜란드 선거에서 상원의 제1당으로 올라서는 이변을 일으켰다. 암스테르담/ EPA 연합뉴스
네덜란드 연립정부가 생물 다양성을 위협하는 질소 방출을 줄이기 위해 기축 수의 3분의 1을 줄이고 수천개 농장을 폐쇄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지난해 7월 “농민이 없으면 식량도 없다”는 펼침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이런 농민시위 과정에서 창당된 신생 ‘농민시민운동당’(BBB)은 올 3월 치러진 네덜란드 선거에서 상원의 제1당으로 올라서는 이변을 일으켰다. 암스테르담/ EPA 연합뉴스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정부가 식당 등의 일회용 종이컵 사용 제한을 없던 일로 했다. 자영업자의 비용 증가와 소비자 불편을 이유로 들었지만, 총선을 겨냥한 ‘표퓰리즘’이란 비판이 쏟아졌다. 일회용 컵을 쓰지 않으면 한국에서만 연간 자동차 9만2천대분의 탄소배출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는 환경단체의 분석이 마침 나왔지만 불편과 비용 증가, 그리고 정치적 계산 앞에서 환경과 생태의 가치는 성가신 규제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만 이러는 게 아니다. 기후위기가 고조되면서 여러 나라가 화석연료 퇴출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이에 대한 불만과 반발도 커지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과 전쟁에 따른 에너지 위기, 고물가·고금리에 지친 사람들에게 기후변화 대응은 피곤한 일이다. 정치인은 이런 심리를 파고들어 반감을 부추기고 정치적 이득을 꾀한다. 그래서 친환경 정책에 반발하는 ‘그린래시’(Greenlash)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유럽은 세계의 기후변화 대응을 주도해 왔으나 요즘 멈칫거린다. 전기차 전환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영국은 내연기관 차량 판매 중단 시점을 2035년으로 5년 늦췄다. 지난 8월 노후 차량 운행을 규제하는 초저배출구역(ULEZ) 제도 도입에 런던 시민들이 감시카메라를 부수며 과격한 시위를 하자, 친환경 정책에 대한 국민의 반발에 정치인들이 민감해졌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벨기에의 알렉산더르 더크로 총리는 유럽연합 환경규제의 ‘일시 중지’를 촉구하기도 했다. 유럽의 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중국과 미국만 득을 본다는 이유에서다. 선거에서 친환경 정책이 경제에 부담을 준다고 주장하는 우파 정당들이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등에서 약진했다. 영국의 ‘가디언’은 “유럽 극우 정당을 뭉치게 하는 전선이 ‘반이민’에서 ‘기후위기’ 등으로 넓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친환경 정책에 대한 불만은 우파 포퓰리스트들의 먹잇감이 되고 있다. 이들은 기후나 생태 이슈를 먹고사는 일에 무감각한 좌파 엘리트나 환경주의자가 대중을 괴롭히는 일로 틀짓기 한다. 재임 중 파리 기후변화협정에서 탈퇴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9월 자동차산업 노동자를 겨냥해 “미국 노동자에게 충성하거나 환경 미치광이에게 충성할 수 있지만, 둘 다에 충성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환경이냐 경제냐의 갈라치기가 심해지면서 기후위기 대응이 진보와 보수 간 ‘문화전쟁’의 마당이 되고 있다. 미국은 기후 이슈가 진영화된 대표적인 나라다. 지난해 퓨 리서치센터가 19개 나라를 조사한 자료를 보면, “기후변화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 비율이 진보는 85%지만 보수는 22%로 그 차이가 63%포인트나 벌어졌다.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독일도 격차가 컸지만 미국만큼은 아니었다. 조 바이든 지지자의 87%가 “기후변화가 인간활동의 결과”라고 보았지만, 트럼프 지지자는 21%만 동의했다는 다른 조사도 있다. 이런 속에서 공화당의 선두주자인 트럼프가 내년 대선에서 승리하면 지구촌의 기후위기 대응은 적잖이 뒷걸음질할 것이다.

한국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앞의 퓨 센터 조사에서 “기후변화가 중대한 위협”이란 응답 비율이 조사 대상국 중 최상위권이었고, 진보와 보수의 격차가 8%포인트(87% 대 79%)에 불과할 정도로 정치적 성향에 따른 의견 차이가 작다. 하지만 탈원전을 둘러싼 진영 대립이 보여주듯, 언제 기후변화 대응이 진영논리에 희생될지 모른다. 걱정인 것은 그간 국내엔 없던 노골적인 기후변화 부인론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환경 관련 국가 연구기관장까지 지낸 한 대학 원로 교수는 최근 “기후정의 투사들이 기업과 사회체제를 전복하려 한다”고 주장하는 책을 내고 유튜브 방송까지 하고 있다. 일부 언론은 그의 주장을 인터뷰 등으로 다뤄주기도 한다.

친환경에 ‘역풍’이 부는 것은 그만큼 지구를 살리는 노력이 구체화한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지속가능성이 추상적인 목표일 때는 누구나 좋은 말을 할 수 있지만, 휘발유 가격이나 전기요금 인상같이 구체적인 불편과 비용으로 다가올 때 비로소 진실의 순간이 온다. 배가 산으로 가는 일이 없어지려면 정치인과 정부는 전환이 정의롭도록 세심히 기획하고 폭넓은 합의를 끌어내며, 일관되게 실행해야 한다. 불평등에 따른 균열, 미-중 패권경쟁에 포퓰리즘 발호까지 도처에 지뢰밭이지만, 그럼에도 협력의 지혜를 발휘할 때만 인류에게 미래가 있다.

bhlee@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1567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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