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해병대원 순직사건 축소 외압 의혹을 폭로했다가 항명 혐의로 입건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이 예비역 동기생들과 두 손을 꼭 잡은 채 지난 1일 오전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으러 서울 용산 군사법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해병대원 순직사건 축소 외압 의혹을 폭로했다가 항명 혐의로 입건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이 예비역 동기생들과 두 손을 꼭 잡은 채 지난 1일 오전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으러 서울 용산 군사법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곽정수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최근 독일 현지 취재 중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독일의 학교는 ‘시민의 용기’를 가르친다. 법제도를 준수하는 것은 민주시민의 당연한 의무이다. 하지만 국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독일은 학생들에게 “아니요”라고 외치고, 용기 있게 저항하도록 권장한다. 설령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을 위험이 있더라도.

독일이 시민의 용기를 중시하는 배경은 많은 분들이 이미 짐작하셨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만행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다. 다수 국민이 국가의 잘못된 행위에 순종하고 저항하지 않았던 것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역대 독일 대통령과 총리가 “독일의 역사적 책임에는 끝이 없다”며 과거의 잘못을 거듭 사죄해온 것과 같은 연장선에 있다.


해병대원 순직사건 축소 외압 의혹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의 ‘용기’ 덕분이다. 군 수뇌부가 수사 결과의 경찰 이첩을 보류하고, 과실치사 혐의자에서 사단장을 제외하라고 압박했지만 순응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격노해 국방장관을 질책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대통령실과 군 수뇌부의 외압은 명백한 위법행위이기 때문이다. 군사법원법은 군내 사고로 인한 사망사건은 군사경찰이 수사할 수 없고, 민간경찰에 의해 수사받도록 개정됐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대통령이더라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 박 대령의 용기는 권력의 보복 같은 큰 불이익의 위험성을 감수했다는 점에서 더욱 빛이 난다.

박 대령이 상명하복의 일사불란한 지휘체계가 중요한 군인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들도 있다. 이런 분들에게는 독일 연방방위부(국방부) 누리집의 ‘국방정책 가이드라인’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가이드라인은 독일 군인의 정체성을 ‘제복을 입은 시민’으로 규정한다. 군인 제복을 입었다고 해서 민주시민으로서 헌법적 권리와 의무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한국 정치를 전공한 하네스 모슬러 독일 뒤스부르크에센대 교수는 이번 사태에 대해 “독일이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 군법도 원칙상 독일과 다르지 않다. 군형법 44조는 명령 불복종을 불법으로 규정하면서, 명령이 정당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붙였다. 박 대령은 이첩보류 명령을 명시적으로 들은 바 없다고 항명 혐의를 부인하지만, 설령 명령이 있었더라도 달라질 건 없다. 부당한 명령은 거부해야 마땅하다.

요즘 우리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유린되는 참상을 거의 매일같이 목도하고 있다. 지난 수십년간 독재와 맞서 싸우며 힘들게 쌓아온 소중한 성과들이 무참히 훼손되고 있다. 민주주의 유린이 검찰·감사원과 같은 국가기관에 의해서 법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현실은 더욱 견디기 힘들다. “5·16(군사쿠데타)은 혁명” “12·12(군사반란)는 구국” “촛불(시민혁명)은 반역”이라는 망언을 서슴없이 내뱉는 반시대적 인물이 국방장관 후보로 지명되는 게 대한민국의 ‘웃픈’ 현실이다. 40여년간의 민주주의 성취가 결코 작지 않지만,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뿌리를 내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절망에 빠질 필요는 없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시민의 용기’가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군사법원의 군판사는 박 대령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군사법원의 독립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에서도 외압 의혹을 덮으려는 술수에 제동을 걸었다. 해병대 사관 예비역 동기생들은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가는 박 대령의 손을 잡고 함께 행진했다.

검찰 수사를 앞세운 민주주의 유린 세력이 겉으론 단단해 보이지만, 이미 균열은 시작됐다. 거대한 댐이 무너지는 것도 작은 균열에서 시작된다. 동이 트기 직전에 세상이 가장 깜깜한 법이다. 민주주의 유린 세력이 버티는 것은 그 밑에서 부당한 지시에 말없이 순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국민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민주주의 유린에 대해 단호히 “아니요”라고 말하는 용기를 보여줄 때다.

진정한 정치인이라면 ‘시민의 용기’를 북돋을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윤석열 정부에 항거한다고 18일째 단식 중이다. 하지만 이 대표가 검찰 수사의 부당성을 이유로 국회의원 불체포특권에 매달리는 것이 민주주의 유린 세력의 붕괴를 막아주는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대표가 체포동의안 가결에 앞장서고, 검찰의 영장청구를 정면돌파하는 더 큰 용기를 보여줄 수는 없을까? 국민이 민주주의 유린에 대해 단호히 “아니요”라고 말할 용기를 살리는 촛불이 될 것이다.

jskwak@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088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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