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100% 사용을 약속하는 ‘아르이(RE) 100’에 가입하는 세계적인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국내 수출기업에 새로운 무역장벽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에 따라 산업통상자원부가 원전까지 포함해 우리에게 불리하지 않은 ‘무탄소에너지(CF) 100’을 새로운 국제 규범으로 확산하겠다며 17일 상공회의소에서 대한상공회의소, 기업들과 함께 무탄소에너지 포럼 츨밤식을 열었다. 이봉현 기자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100% 사용을 약속하는 ‘아르이(RE) 100’에 가입하는 세계적인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국내 수출기업에 새로운 무역장벽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에 따라 산업통상자원부가 원전까지 포함해 우리에게 불리하지 않은 ‘무탄소에너지(CF) 100’을 새로운 국제 규범으로 확산하겠다며 17일 상공회의소에서 대한상공회의소, 기업들과 함께 무탄소에너지 포럼 츨밤식을 열었다. 이봉현 기자

이봉현ㅣ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현 정부는 탈원전 정책 폐기를 잘한 일 중 으뜸으로 내세운다. 윤석열 대통령은 탈원전이 이념에 사로잡힌 정책이라며,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는 공직자는 과감히 인사 조처하라고 했다. 원전을 이념에 구한 윤 대통령은 그럼 에너지 전환의 현실에 맞게 실사구시하고 있을까? 최근 사례를 보면 원전에 ‘추앙’이라는 새로운 이념이 드리우는 게 아닌가 걱정된다.


우선 정부는 원전 수출 기대를 과하게 부풀린다. 윤 대통령은 임기 내에 10기의 해외원전 수주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시공능력과 가격 경쟁력을 갖춘 한국 원전을 많이 수출하면 국내에 일자리도 생기고 좋은 일이다. 지금 나온 폴란드(2기), 체코 (1기), 사우디 (2기) 발주분을 착실히 챙기면 불가능한 목표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반대로 가고 있다. 원전 강국에 복귀하려는 미국이 한국을 경쟁자로 보고 조여오기 때문이다.

4월 말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는 이례적으로 원전 협력의 원칙이 담겼다. “각국의 수출통제 규정과 지식재산권을 상호 존중하는 가운데, 국제원자력기구(IAEA) 추가의정서에 일치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는 내용이다. 언론은 무슨 뜻인지 모르고 지나갔지만, 이를 보고 놀라는 원자력 전문가가 다수였다. 한국의 원전 수출에 먹구름이 끼는 합의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독자적인 원전 수주는 사실상 어려워졌다”는 보도들이 뒤를 이었다.

‘지식재산권 존중’이란 문구는 폴란드, 체코 등에서 우리와 수주경쟁을 하는 웨스팅하우스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원전을 수출할 때마다 웨스팅하우스와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으라는 요구다. 웨스팅하우스는 한국형 원전 ‘에이피알(APR) 1400’에 자신의 원천기술이 들어있다며 제3국 수출을 제한해 달라는 소송을 지난해 10월 미국 연방법원에 냈다. 한미 정상 간 공동성명이 발표된 날 패트릭 프래그먼 웨스팅하우스 사장은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언론에 한국이 “미국법과 국제법을 어기고 있다”며 “우리는 폴란드에 한국원전이 절대로 건설될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는 도발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한국수력원자력과 한국전력은 에이피알 1400은 한국의 연구개발 성과가 더해진 독자모델이라 강조한다. 하지만 미국 원자력계는 대체로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지난 1월 미국 에너지부(DOE)가 체코 원전수출을 위해 한국이 낸 신고서를 반려한 것도 웨스팅하우스와 협의하라는 신호로 읽혔다. 여기에 더해 ‘추가의정서에 일치하는 방식’이란 문구는 핵확산 방지에 협조하지 않는 사우디나 이집트 같은 곳에는 원전 또는 기자재를 수출하지 말라는 경고이다. 강정민 전 원자력안전위원장은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도 핵 비확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우디 원전 수출은 불가능하다 봤다”고 <한겨레>에 말했다.

독자 수주길이 막히면 웨스팅하우스에 기술료를 지불하거나 시공, 기자재를 납품하는 방식도 있다. 어느 경우든 수익성은 떨어지게 된다. 일본 업체도 달려들 텐데 한국을 하청 파트너로 삼는다는 보장도 없다. 산업부와 한수원은 미국과 협의해 풀어가겠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이 녹록지 않은 것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양국 간 갈등의 매듭이 풀리긴커녕 더 불리해진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원전 수출은 국내에 원전을 지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산업 생태계가 죽으면 안 된다는 논리다. ‘원전수출 강국’을 자부하면서도 정작 정부가 미국 정부와 원자력계의 동향을 제대로 파악했는지 의문이다. 정부는 지난해에도 미국 인플레이션방지법(IRA)에 따른 전기차 보조금 지급 규정을 놓친 적이 있다.

현 정부는 재생에너지 ‘숙제’를 원전으로 대신해도 되는 듯 행동한다. 국제사회에서 통하지 않을 계산이다. 생산과정에서 재생에너지 사용을 독려하는 ‘아르이(RE) 100’ 규범에 따라 국내 수출기업이 압박을 받기 시작하자 산자부는 원전이 포함된 ‘무탄소(CF) 100’을 띄우려 한다. 이달 17일에는 기업들을 불러모아 무탄소에너지 포럼 출범식도 치렀다. 우리에게 불리하지 않은 국제 표준을 확산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글로벌 기업들이 굳이 ‘시에프 100’으로 바꾸려 할까? 아르이 100은 미국과 유럽의 큰 회사들이 자발적으로 가입한 민간 캠페인이어서 정부나 국제기구가 이래라저래라 하기 어렵고, 이미 태양광·풍력으로 목표를 달성한 기업도 많기 때문이다. 주요 8개국(G8) 진입을 노린다지만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새로운 표준을 미국·중국·유럽이 수용토록 할 정도인 지도 의문이다.

소형모듈원자로(SMR)가 안전, 입지, 경제성 측면에서 ‘게임체인저’가 되리란 장밋빛 기대도 검증이 필요하다. 윤 대통령 방미 이후 미국 에스엠아르 선두주자인 뉴스케일파워와 국내 기업들이 경북에 에스엠알 6기 건설을 추진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런데 에스엠아르는 아직 한 기의 실험로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설계도 상의 원전이다. 원전이 작다고 비용이 싸지거나 입지상 거부감이 없는 게 아니어서 상용화에 걸림돌이 많다. 미국에서도 잦은 설계변경과 건설비 증가로 뿌리내리지 못한 기술을 들여와 국내에서 첫 상용화 실험을 하는 게 타당한 것일까?

탄소 중립을 위해 원전의 역할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데 수긍하는 국민도 많고,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세계 각국에서 원전을 다시 생각하는 분위기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탈원전 뒤집기가 ‘원전 과몰입’이 되면 또 다른 부작용을 낳는다. 정부 예산을 헛되이 쓰고 행정력을 낭비하게 된다. 세계적 추세대로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에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해야 할 때, 잘못된 정책 시그널은 귀중한 시간 낭비로 이어질 수 있다.

bhlee@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929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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