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정부는 기름값이 급등하자 유류세를 법적 한도인 37%까지 인하했다.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대흥동의 한 주유소에서 내 건 유가 알림판에 휘발유가격이 2169원 표시되어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정부는 기름값이 급등하자 유류세를 법적 한도인 37%까지 인하했다.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대흥동의 한 주유소에서 내 건 유가 알림판에 휘발유가격이 2169원 표시되어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20220717501741.jpg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분리수거. 정부 정책이 내 생활을 바꾼 것으로 이만한 게 있을까? 아직 미흡한 구석도 있지만, 한국은 독일에 이어 두번째로(2013년 기준) 재활용을 잘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이다. 재활용품 분리수거를 성공으로 이끈 데는 1995년 시작한 ‘쓰레기 종량제’ 정책이 있었다. 그간 아무 데나 담아 내놓던 쓰레기를 종량제 봉투로만 배출하도록 했다. 쓰레기양에 비례해 봉투비 지출이 늘자, 가정에서는 재활용되는 물품을 최대한 골라내 부피를 줄이게 됐다. 아파트 같은 집단주택이 많아 유리하기도 했지만, 종량제 없이 홍보만으로 분리수거 참여가 이렇게 높아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책은 세상을 바꾼다. 하지만 잘 설계된 정책만이 저항을 이겨내고 세상을 앞으로 밀고 간다. 명분도 좋고 실리도 있어 시민들이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 든다면 성공을 예약한 정책이다.

고유가와 물가상승에 대응해 각국 정부가 시민의 생활비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을 내놓고 있다. 그중에 독일이 6월부터 시행 중인 ‘9유로 승차권’ 정책은 여러 생각할 거리를 준다. 약 1만2천원짜리 승차권을 사면 한달간 전국의 버스, 지하철, 철도 등 대부분의 근거리 교통수단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 베를린에서만 쓸 수 있는 대중교통 한달권이 86유로인 데 비하면 파격적인 혜택이다. 올라프 숄츠 총리 정부는 대신 25억유로(약 3조3천억원)를 버스·철도 회사에 보조금으로 지급한다.

승용차 이용을 줄여 에너지 절약과 탄소배출 감소를 꾀하는 정책목표는 새로 출범한 ‘신호등 연정’(사민-자민-녹색당)의 친환경 가치가 담겨 있다. 8월까지 한시적으로 시행하지만, 이 3개월은 가격에 따른 대중교통 이용량 변화를 모니터링하는 등 향후 기후친화적 모빌리티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정책실험 기간이기도 하다. 관심은 폭발적이어서 6월 한달간 독일인 중 3분의 1이 이 승차권을 사용했다. 자가용 이용자들이 대거 대중교통으로 넘어왔고, 도심 교통체증은 줄었다. 버스나 기차가 혼잡해졌다는 불평도 나오지만, 독일 국민 다수는 이 정책을 좋게 평가한다.

이 정책의 성공은 대중교통시스템 단순화 등 더 진전된 이야기를 할 공간을 열었다. 그중 하나가 하루 1유로(연 365유로)로 대중교통을 맘껏 이용할 수 있는 ‘기후 티켓’ 도입 논의다. 사민당은 2019년부터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연 365유로 정기권 도입을 제안했으나, 너무 급진적이라는 비판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슈피겔>이 7월1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4%가 이런 정책 도입에 찬성했다. ‘9유로 승차권’을 경험하면서 시민들의 생각이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한국 정부는 유가 급등에 ‘세금 인하’로 대응했다. 유류세 인하가 없었다면 리터당 2천원을 웃도는 휘발유와 경유 가격이 한층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금 인하를 넘어 환경과 소득분배까지 고려한 정책을 내놨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유류세 인하의 역기능도 있기에 그렇다. 먼저 대형차를 타고 다니는 부유층일수록 세금 인하의 혜택이 커진다. 에너지 절약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일은 안중에 없는 정책이기도 하다. 연간 10조원 가까운 세수입 감소가 예상되지만, 주유소 가격은 찔끔 내려 소비자가 체감하는 효과는 크지 않을 수 있다. 이럴 바에는 그 돈을 독일처럼 대중교통 이용 확대를 위해 쓰거나, 화물차 운전자, 배달기사 등 타격이 큰 계층에 직접 지원하는 게 나을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지난달에 낸 보고서에서 유류세 인하보다는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직접지원을 권고했다.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위기가 아니라면 전기차로의 전환 시간표를 대폭 당기는 데 투자할 수도 있을 것이다.


9유로 승차권. 독일 공영방송 &lt;체트데에프&gt;(ZDF) 화면 갈무리
9유로 승차권. 독일 공영방송 <체트데에프>(ZDF) 화면 갈무리

정책에 어떤 가치와 비전을 담고, 유인구조(인센티브)를 어떻게 설계해 참여를 유도할지는 매우 중요하다. 윤석열 정부는 ‘엠비(MB) 시즌 2’라는 달갑지 않을 별명을 얻었다. 정부와 대통령실 요직에 엠비 정부의 인물들이 포진했고, 정책 기조도 친시장, 감세, 작은 정부 등 ‘시장 프렌들리’를 내세운 초기 엠비의 그것과 유사하다. 이런 ‘올드보이’들이 내놓는 정책의 특징은 재방송 드라마처럼 감흥이 없는 것이다. 이 고통의 여름이 지나면 에너지와 식량 부족으로 세계적인 ‘불만의 겨울’이 올 거라 한다. 힘든 시대를 잘 건너가려면 정책의 상상력이 좀 더 필요하다.

bhlee@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51262.html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유레카] 제트세대의 문해력 ‘수평적 읽기’ / 구본권

페이스북은 코로나19와 관련된 허위정보 게시물을 삭제하던 정책을 중단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페이스북은 초기엔 “표현 자유”를 내걸고 백신음모론 등 허위정보를 방치했는데 비판이 높아지자 방침을 바꿔 지난 2년간 2500만...

  • HERI
  • 2022.08.22
  • 조회수 426

[아침햇발] 기업이 ‘반칙’하기 좋은 나라 / 곽정수

윤석열 대통령이 1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취임 100일을 맞아 연 첫 공식 기자회견에서 소회와 국정운영 구상을 밝히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곽정수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법과 윤리를 위반한 임직원...

  • HERI
  • 2022.08.19
  • 조회수 440

“일주일내 범죄 발생 예측 정확도 90%” AI 도입 득될까?

시카고 구역별 범죄 발생확률 AI, 높은 정확도 예측 불구 유색인종, 빈곤층 과잉 대표 채용시 민감정보 배제해도 성·인종 추정가능 대리지표로 ‘비의도적 차별’ 만들어내 인공지능이 학습하는 데이터 차별 만연한 사회현실 반...

  • HERI
  • 2022.08.09
  • 조회수 593

5살 취학과 아이스하키 선수들의 생일 격차 [유레카]

캐나다에서 아이스하키는 인기 높은 국민스포츠인데, 청소년 명문구단 선수들의 생일을 분석했더니 이색적인 통계가 나왔다. 전체 선수의 40%가 1~3월에 태어났고, 상반기 출생 선수를 합치면 전체의 70%에 이르렀다. 11~12월에 ...

  • HERI
  • 2022.08.03
  • 조회수 641

[아침햇발] ‘아마추어’ 대통령 / 곽정수

윤석열 대통령이 2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하면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의 특별 사면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답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제공 곽정수 | ...

  • HERI
  • 2022.07.26
  • 조회수 878

[아침햇발] 정책 상상력이 아쉬운 ‘올드보이’ 정부 / 이봉현

정부는 기름값이 급등하자 유류세를 법적 한도인 37%까지 인하했다.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대흥동의 한 주유소에서 내 건 유가 알림판에 휘발유가격이 2169원 표시되어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이봉현 | 경제사...

  • HERI
  • 2022.07.19
  • 조회수 613

[유레카] 카톡에 올린 자녀 사진의 프라이버시권

2016년 캐나다 캘거리에 사는 당시 13살 소년 대런 랜들이 부모를 상대로 합의금 수억원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부모가 자기 얼굴에 초콜릿을 묻히고 사진을 찍는 등 아기 시절 ‘굴욕 사진’들을 페이스북에 10년 넘게 공...

  • HERI
  • 2022.07.13
  • 조회수 851

당신의 임신 중지, 빅테크 ‘디지털 흔적’으로 남아 있다

임신중지 기소때 디지털증거 활용관행 위치 정보, 문자메시지, 검색 기록 등 “공권력의 디지털정보 요청을 빅테크가 판단·결정할 수 있는가” 빅테크의 민주적 정당성 문제 부각 지난 6월 25일 시민들이 미국 연방대법원 청사 ...

  • HERI
  • 2022.07.13
  • 조회수 627

[아침햇발] 대통령이 ‘바이네르 구두’를 살 때 못 들은 이야기 / 곽정수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첫 주말인 지난 5월14일 부인 김건희 여사와 서울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의 바이네르 매장을 찾아 제품들을 둘러보고 있다. 바이네르 제공 곽정수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김원길(61) 바이네르 대표...

  • HERI
  • 2022.06.27
  • 조회수 656

[아침햇발] ESG에 부는 역풍 / 이봉현

지난 2년간 한국 기업에도 이에스지 ‘열풍’이 불어 이에스지 위원회를 꾸리고 경영의 지표로 삼는 기업이 크게 늘었다. 한국거래소 누리집 갈무리 이봉현ㅣ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테슬라의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가 이에...

  • HERI
  • 2022.06.22
  • 조회수 867

[유레카] 인터넷 익스플로러와 한국 웹환경 / 구본권

웹브라우저의 대명사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출시 27년 만에 사라졌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예고해온 대로 지난 15일 익스플로러에 대한 지원을 공식 종료했다. 이날 이후 익스플로러를 실행하면 엠에스의 새 브라우저인 ‘에지...

  • HERI
  • 2022.06.20
  • 조회수 718

[아침햇발] ‘신기업가정신’ 선언이 쇼가 아니라면 / 곽정수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주주에 대한 봉사와 이윤 극대화라는 가치를 넘어 종업원과 고객, 납품업체 등 모든 이해관계자들에 대한 사회적 책무를 강화하겠다.” 2019년 8월19일 미국 200대 대기업 협의체인 비즈니...

  • HERI
  • 2022.05.31
  • 조회수 958

[아침햇발] ‘한국이 말한다’를 시작할 때

2017년부터 해마다 열리는 ‘독일이 말한다’에서 생각이 크게 다른 두 사람이 짝을 이뤄 대화를 하고 있다. <디 차이트> 온라인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소셜미디어를 넘겨보다 몇번 불편하면 ‘친구 끊기’를 ...

  • HERI
  • 2022.05.20
  • 조회수 974

[유레카] ‘반지성주의’와 ‘투명성’ / 구본권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0일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를 화두로 밝혔다. 윤 대통령은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 HERI
  • 2022.05.16
  • 조회수 982

[유레카] ‘고발당한’ 노사협의회 / 곽정수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지난 3일 윤석열 정부의 110대 국정과제를 발표했다.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다면서 51번째 과제로 노사협력을 제시했다. 또 이를 위해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의 대표성·독립성 강화를 통해 참...

  • HERI
  • 2022.05.08
  • 조회수 1193

[유레카] 넷플릭스 신화의 추락과 뉴노멀 / 구본권

코로나19로 인한 일부 현상은 팬데믹이 지나가도 일상으로 자리잡을 ‘새로운 표준’(뉴노멀)이 될 것이라고 예측됐다. 비대면 회의와 배달 문화, 영화관 대신 온라인 동영상 감상 등이 대표적 사례인데 팬데믹 탈출 시기에 검증...

  • HERI
  • 2022.04.26
  • 조회수 922

[유레카] 박용만, 윤석열과 정치 /곽정수

박용만 전 대한상의 회장이 최근 윤석열 정부의 첫 총리 후보설 , 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설에 대해 “정치할 생각이 없다”며 확실히 선을 그었다. 1년 전 박 전 회장이 상의 회장을 그만두기 직전에 인터뷰한 적이 있다. ...

  • HERI
  • 2022.04.25
  • 조회수 899

[아침햇발] 로비스트가 총리·장관 하면 안된다 / 이봉현

새 정부 초대 총리 후보로 지명된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3일 서울 통의동 인수위 기자회견장에서 발언을 하기 위해 마스크를 벗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흔하게 보지만 계속 없는 척하기...

  • HERI
  • 2022.04.15
  • 조회수 893

[유레카] 삼성 수사와 윤석열의 ‘친기업’ / 곽정수

검찰이 최근 삼성전자와 웰스토리를 압수수색했다. 공정위가 지난해 6월 삼성전자 등이 웰스토리에 사내 급식 물량 몰아주기를 했다면서 2349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고발한 지 9개월 만이다. 그동안 뒷짐 지고 있던 검찰이 ...

  • HERI
  • 2022.04.11
  • 조회수 1102

[유레카] 아마존 노조와 빅테크 힘의 균형 / 구본권

지난 1일 세계 최대 온라인상거래 업체 아마존에서 노조 설립안이 통과했다. 미국 뉴욕의 스태튼아일랜드 아마존물류센터 직원들의 투표 결과, 55%가 찬성했다. 1994년 온라인 서점으로 출발해 디지털 삶을 혁신시켜온 아마존닷컴...

  • HERI
  • 2022.04.05
  • 조회수 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