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첫 주말인 지난 5월14일 부인 김건희 여사와 서울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의 바이네르 매장을 찾아 제품들을 둘러보고 있다. 바이네르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첫 주말인 지난 5월14일 부인 김건희 여사와 서울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의 바이네르 매장을 찾아 제품들을 둘러보고 있다. 바이네르 제공

곽정수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김원길(61) 바이네르 대표는 요즘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는 영국 시인 바이런의 말을 실감 중이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5월 중순 서울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의 바이네르 매장을 찾아 구두를 산 뒤로 이른바 ‘윤석열 특수’를 만끽하고 있다. 대통령이 구입한 컴포트화(편안한 기능성 구두)가 동나는 등 판매량과 매출이 급증했다. 그는 “코로나 이후 전국 70여개 매장 중에서 월 매출 1억원을 넘는 곳이 없었는데, 5월에는 5곳이나 됐다. 6월에는 더 늘어날 것 같다”고 웃음 지었다.

김 대표의 인간승리 스토리도 함께 소개되어 잔잔한 감동을 안겨준다. 김 대표는 중졸 출신의 구듯방 견습공으로 시작해, 30여년 만에 국내 컴포트화 1위의 제화업체를 키웠다. 성공한 뒤에도 고단했던 어린 시절을 잊지 않고 매년 10억원씩 들여서 어르신 효도잔치를 열고,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우수장병을 해외연수도 보내며 사회공헌에 힘써 왔다.

김 대표는 5월 말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열린 중소기업인대회에서 대통령을 직접 만났다. 그가 “이 빚을 어떻게 갚을지 모르겠다”며 고마워하자, 대통령은 “(성공해서) 부자로 사는 게 빚을 갚는 것”이라고 격려했다. 김 대표는 “그 순간 울컥했다”고 털어놨다. <힘들어도 괜찮아>라는 책을 냈다가, 코로나 사태로 회사가 존폐 위기를 겪으면서 “미친 짓 했다”고 후회했는데, 다시 힘을 얻게 됐다고 한다.

김 대표는 “그날 대통령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못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무슨 내용이냐고 물으니, 글로 정리 중이라고 한다. 기자는 지난 10여년간 김 대표를 옆에서 지켜봤다. 깊은 대화도 수차례 나누었다. 그가 대통령에게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대통령이 바이네르 구두를 샀지만, 정작 듣지 못한 이야기다. 언론도 대통령의 방문이 100억원 광고보다 효과가 더 컸다는 김 대표의 말을 대서특필했지만, 놓쳐버린 이야기다.

바이네르처럼 대형 유통업체(백화점)와 거래하는 중소입점·납품업체는 대부분 30%대 중반에 달하는 높은 판매수수료를 부담한다. 매출의 3분의 1 이상을 수수료로 떼이는 것이다. 백화점에서 팔리는 제품을 더 선호하는 소비자 기호 때문에 거래 중단도 쉽지 않다. 김 대표는 “이런 현실에서 버틸 중소기업은 없다. 대다수 국내 브랜드는 빚더미에 올라 이미 망했거나 망해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백화점이 외국 명품 브랜드에 부과하는 수수료는 5~15%에 불과하다. 대형 유통업체들이 중소기업의 피를 빨아서 외국 기업에 바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세계적으로 전례가 드문 특약매입 거래방식도 악명이 높다. 백화점은 납품업체로부터 상품을 반품 조건을 달아 외상으로 매입해서 판다. 재고 부담과 판매사원 인건비는 납품업체의 몫이다.

김 대표는 대다수 중소기업이 백화점의 눈치를 볼 때 혼자서 수수료 인하를 요구하며 ‘중소기업 해방일지’를 써왔다. 당연히 미운털이 박혔다. 언론에서 과다한 수수료를 비판하는 기사가 나오면 으레 김 대표가 제보자로 의심을 받았다. 백화점업계 회의에서 김 대표를 그냥 놔둬서는 안 된다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다.

역대 정부가 지나친 수수료를 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큰 성과가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 후반 백화점에 납품하는 중소업체와 간담회를 했다. 백화점 업계가 이를 미리 알고 행사 직전 수수료 인하 계획을 전격 발표하며 선수를 쳤다. 이 대통령은 간담회에서 “백화점에서 일해 봐서 아는데, 수수료 인하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끝까지 (수수료 인하를) 관철시키라”고 배석한 공정위원장에게 지시했다. 하지만 백화점들은 몇달 뒤 해가 바뀌자 수수료를 다시 슬그머니 올렸다.

코로나 위기 이후 대-중소기업 간 양극화가 심화했다. 최근 원자재 가격 상승과 금리 인상도 중소기업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공정한 시장질서 확립과 상생경제 구현을 위한 정부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새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을 보면 그런 의지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혜택이 극소수 대기업에만 주어지는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를 강행하며 ‘친 대기업’ 의지를 보인 것과 대비된다.

윤석열 정부는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을 내세운다. 하지만 그 전제 조건인 (대기업의 성장과실이 전체 경제로 흘러가는) 낙수효과가 사라졌다는 진단이 나온 지 오래다.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 중반 뒤늦게 ‘동반성장 대책’을 내놓고, 박근혜 대통령이 2012년 대선에서 경제민주화를 앞세운 데서 교훈을 제대로 얻지 못한 것 같다.

대기업들은 새 정부에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요구한다. 중소기업이 바라는 기업 하기 좋은 나라는 대기업의 갑질이 없는 나라, 대-중소기업이 상생하는 나라다. 상생을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대기업 자율에만 맡겨놓으면 부지하세월이다. 그렇다면 대기업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를 판매수수료 인하나 납품단가 정상화 같은 상생 노력과 연계하는 방안이라도 강구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역대 정부는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대기업에 투자와 고용을 구걸했다. 김원길 대표는 평소 “ 백화점이 판매수수료를 5% 포인트만 낮추면 연구개발 투자를 매년 20 억원씩 추가로 할 수 있고 , 세계적인 기업과도 정정당당히 겨룰 수 있다” 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는 또 “대기업의 갑질이 사라지면 청년들 창업이 훨씬 더 많아질 것”이라는 말도 자주했다. 기존 관행을 깨면서 신선함을 던져주고 있는 윤 대통령이 꼭 들었으면 싶은 이야기다.

대통령이 모든 중소기업의 제품을 사줄 수는 없다. 바이네르의 ‘윤석열 특수’도 영원할 수 없다. 대통령의 희망대로 많은 중소기업이 성공해서 부자가 되려면 그들의 말을 먼저 경청해야 한다. 단지 구두 사고 사진 찍는 것에 그친다면, 진정한 소통이 아니라 ‘정치 쇼’나 ‘이미지 정치’로 전락한다.

jskwak@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4848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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