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신협, 사회적 경제 지원해야

HERI 2022. 02. 03
조회수 1453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자조와 협력으로 전후 어려움 극복한 신협
세계 4위 협동조합 금융기관으로 성장했지만
민간 금융사 운영 방식 따르며 정체성 잃어

사회적 경제 특화 금융 체계 만들어
정부 정책자금에 의존 않도록 해야
지난해 열린 ‘제3회 대한민국 사회적경제 박람회’에 참여한 신협의 홍보 부스. 신협 제공
지난해 열린 ‘제3회 대한민국 사회적경제 박람회’에 참여한 신협의 홍보 부스. 신협 제공

20220128501912.jpg

1950년대 후반,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한국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는 크고 깊었다. 당시 남북한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6백만명이 죽거나 다쳤고 도로, 교통,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미국이 원조 방식을 무상에서 유상으로 바꾸면서 한국경제는 불황으로 빠져들었다. 총 실업률은 34%에 달했다. 실업자 수가 200만명을 넘었지만, 일자리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그 시절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자조와 협동을 바탕으로 한 신용조합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다. 사회 전반에 극심한 생활고와 불신 풍조가 만연하던 때였다. 신용조합이라니, 무엇을 믿고 돈을 맡긴단 말인가. 실패를 예견한 사람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신협은 보란 듯이 성공했다. 조합원들의 자율 의지와 상호신뢰가 바탕이 된 순수 민간운동이 민들레처럼 전국에 포자를 퍼뜨린 것이다.


창립 50주년이 되던 2010년. 신협은 조합원 수 558만명, 자산 규모 47조7000억원의 세계 4위 협동조합 금융기관으로 성장했다. 민간의 자생적 금융협동조합으로 출발해 어려운 이웃을 위한 안전망을 구축하고 소상공인과 서민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금융기관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많은 이의 노력과 헌신으로 이룩한 값진 성과다.

어려움도 많았다. 신협의 이념과 운영기법을 복제한 새마을금고의 등장(1963년), 신협법 제정(1972년)을 둘러싼 진영 간 갈등, 일부 조합의 회계사고로 인한 이미지 추락, IMF 위기로 인한 다수 조합의 퇴출, 시중 은행들의 가계금융 진출로 인한 시장 침식 등 그간 내·외부에서 많은 시련과 도전을 겪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안전한 금융기관으로 평가를 받으며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신협은 예금, 대출, 보험 등 금융상품을 취급한다는 점에서는 일반 금융회사와 다르지 않지만, 설립 목적이나 운영 원리 면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 신협의 주인은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이며, 주민들이 낸 예금은 조합원들의 지위 향상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사용된다. 관계 금융을 통해 힘든 이웃의 자립을 돕고 주민과 지역이 더불어 잘사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존재 목적이다.

의사결정 방식도 ‘1인 1표’가 원칙이다. 돈을 많이 내건 적게 내건 공평하게 한 표의 권리를 갖는다. 오직 수익만을 좇고 지배주주가 결정권을 갖는 상업은행과는 성격이 다르다. ‘1명의 부자보다 100명이 잘사는 공동체 금융’을 추구한다. 자본이익에 충실한 민간 금융회사가 지배하고 있는 시장금융 질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철학과 원리를 지향한다.

하지만 신협 본연의 신용사업보다 투자를 통한 고수익 사업에 더 치중하고 있고, 신용보다 담보를 우선시하는 영업 관행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 등은 여전히 개선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조합원들이 고객화되는 등 인적 유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비판에도 자유롭지 못하다. 신협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하는 과제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사회적 경제 영역의 일원으로서, 사회적 경제 기업과 조직을 위한 사회적 금융을 모범적으로 실행해나가야 할 책임도 크다. 정부의 사회적 금융 활성화 정책(2018년) 추진에도, 사회적 기업은 ‘배당 제한’을 문제 삼아 투자를 기피하고 있고, 협동조합의 조합원 출자비는 부채로 간주, 융자 부적격 판정을 받는 실정이다. 역량이 검증된 사회적 경제 기업조차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는 것이다.

시장금융의 작동 방식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사회적 경제 영역에 특화된 금융 지원체계가 필요하다. 조직 특성과 사업목적에 부합하는 맞춤형 금융을 실천할 수 있는 정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 일을 가장 잘 실행할 수 있는 기관이 신협이다. 왜 신협일까. 협동조합 금융기관이 사회적 경제를 지원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캐나다를 보자. 데잘뎅(Dejardin) 신협과 벤시티(Vancity) 신협 등 사회적 경제를 돕는 대표적인 금융회사들은 모두 신용협동조합이다. 우리는 어떤가. 지역에서 사회적 경제를 지원하는 신협은 극히 소수에 불과할 뿐, 대다수는 일반 금융회사와 큰 차이가 없다. 같은 유전자를 공유한 형제들이 돕지 않는데, 다른 이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재 우리나라 사회적 경제 조직은 약 3만여 개로 추정된다. 새로 신설되는 사회적 경제 기업 수도 매년 늘어나고 있다. 전국의 사회적 경제 기업과 조직들,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가족들까지 더한다면 상당한 규모다. 이들이 맡긴 예금을 바탕으로 사회적 경제 기업에 투·융자를 한다면 정부 정책자금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아도 돈의 흐름을 형성할 수 있다.

사회적 경제의 힘은 연대와 협력에서 나온다. 한 덩어리로 뭉치는 것이 연대고 특정한 목적을 위해 힘을 합하는 것이 협력이다. 박제화된 구호가 아닌 현실에서 작동하는 힘을 만들어내려면 먼저 손을 맞잡아야 한다. 작은 차이를 내려놓고 큰 미래를 향해 어깨동무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신협이 걸어온 역사 안에 그 정신과 가치가 오롯이 배어있다.

문진수 사회적금융연구원장


한겨레에서 보기 : 신협, 사회적 경제 지원해야 : 경제일반 : 경제 : 뉴스 : 한겨레 (hani.co.kr)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아침햇발] 로비스트가 총리·장관 하면 안된다 / 이봉현

새 정부 초대 총리 후보로 지명된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3일 서울 통의동 인수위 기자회견장에서 발언을 하기 위해 마스크를 벗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흔하게 보지만 계속 없는 척하기...

  • HERI
  • 2022.04.15
  • 조회수 1278

[유레카] 삼성 수사와 윤석열의 ‘친기업’ / 곽정수

검찰이 최근 삼성전자와 웰스토리를 압수수색했다. 공정위가 지난해 6월 삼성전자 등이 웰스토리에 사내 급식 물량 몰아주기를 했다면서 2349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고발한 지 9개월 만이다. 그동안 뒷짐 지고 있던 검찰이 ...

  • HERI
  • 2022.04.11
  • 조회수 1942

[유레카] 아마존 노조와 빅테크 힘의 균형 / 구본권

지난 1일 세계 최대 온라인상거래 업체 아마존에서 노조 설립안이 통과했다. 미국 뉴욕의 스태튼아일랜드 아마존물류센터 직원들의 투표 결과, 55%가 찬성했다. 1994년 온라인 서점으로 출발해 디지털 삶을 혁신시켜온 아마존닷컴...

  • HERI
  • 2022.04.05
  • 조회수 1184

[유레카] 러시아를 꿇린 31살 우크라 장관의 사이버 전투/ 구본권

땅, 바다, 하늘에 이어 사이버 공간을 제4의 영토로 선언하고 사이버군대를 창설한 국가가 여럿이다. 미국은 2009년, 한국은 2010년 사이버사령부를 창설해 정보전쟁을 대비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정보전이 또하나...

  • HERI
  • 2022.03.16
  • 조회수 1743

[아침햇발] 플랫폼, 규제와 진흥의 줄타기 / 이봉현

지난해 11월 마포구 용강동에서 한 배달노동자가 배달음식을 오토바이 상자에 담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이봉현 경제사회연구원장·논설위원 아파트 정문이 내려다보이는 집에 살다 보니 저녁의 한적함을 잊은 지...

  • HERI
  • 2022.03.15
  • 조회수 1922

[유레카] 정부 정책 뒤집기 ‘올인’ Y(윤석열)노믹스가 놓친 것들

대통령 이름에 이코노믹스(경제학)의 뒷부분을 붙인 합성어는 특정 정부의 차별화된 경제정책을 함축하는 용어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레이거노믹스’가 대표적이다. 감세, 정부지출 축소, 규제 완화 등 공급 중시 ...

  • HERI
  • 2022.03.15
  • 조회수 1423

D-데이 훤히 내다보고, 틱톡으로 여론 모으고…초연결시대의 전쟁

“틱톡은 전쟁위해 설계된 도구” 짧은 동영상 순식간 세계 전파 우크라이나 지지 여론 확산 기여 콘텐츠 승리로 현실 해결 못해 2011년 ‘아랍의 봄’ 무위로 끝나 빅테크 기업 ‘이미지 쇄신’ 기회 중립 위치·책임 회피 어...

  • HERI
  • 2022.03.07
  • 조회수 1225

대선 주자도 모르는 부동산 문제 해결법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20] 공공 지원으로 시세보다 저렴한 사회주택 입주민엔 좋지만, 주택 공급자는 무관심 사회주택 사업자에 인내 자본 공급해 양질의 사회주택 많이 보급하게끔 해야 정부의 적극적 금융 지원이 필...

  • HERI
  • 2022.02.28
  • 조회수 1579

[유레카] ‘15초 영상’ 인기가 알려주는 미래 / 구본권

틱톡은 세대 차가 유난히 큰 모바일 플랫폼이다. 중국 바이트댄스가 서비스하는 15초 동영상 기반의 소셜미디어인 틱톡은 10대 사이에선 선풍적 인기지만 기성세대는 존재조차 모르는 이가 많다. 2020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안...

  • HERI
  • 2022.02.24
  • 조회수 1859

[유레카] 이재용의 ‘노사화합’ 약속은? / 곽정수

지난해 8월 삼성전자와 노조가 창사 52년 만에 처음으로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이재용 부회장이 2020년 5월 대국민 사과에서 “더는 무노조경영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며 삼성 역사 81년 만에 ‘무노조경영’을 포기...

  • HERI
  • 2022.02.22
  • 조회수 1228

사회적 금융이란 무엇인가?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19] 사회적 금융은 시장금융 공백 채우는 활동 금융 취약계층과 낙후 지역 발전 돕고 사회혁신기업 지원과 구성원 삶의 질 높이는 사람과 사회 중심의 따뜻한 금융 언스플래쉬 사회적 금융은 시...

  • HERI
  • 2022.02.11
  • 조회수 1481

[아침햇발] “이건 당신이 대통령이야” 하면 다 되나 / 이봉현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지난해 12월26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상식 회복 공약-성장과 복지의 선순환’ 관련 기자회견을 하기 전 마스크를 벗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경제사회연구원장· 논설위원 지난주 열린 첫 대선 후...

  • HERI
  • 2022.02.10
  • 조회수 1504

‘보행중 시청’ ‘1.5배속 재생’ 유튜브 시청 ‘짜내기’ 신공

삼성전자가 최근 전 직원을 대상으로 ‘5대 안전규정’ 준수를 의무화했다. 5가지 규정은 주요 사업장에서 보행 중 휴대전화 사용 금지, 무단횡단 금지, 운전 중 휴대전화 사용 금지, 운전 중 과속 금지·사내 제한속도 준수,...

  • HERI
  • 2022.02.07
  • 조회수 1720

신협, 사회적 경제 지원해야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자조와 협력으로 전후 어려움 극복한 신협 세계 4위 협동조합 금융기관으로 성장했지만 민간 금융사 운영 방식 따르며 정체성 잃어 사회적 경제 특화 금융 체계 만들어 정부 정책자금에 의존 ...

  • HERI
  • 2022.02.03
  • 조회수 1453

[유레카] 인간만이 지닌 능력 / 구본권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유럽에 알린 콜럼버스는 이후 10여년간 4차례 항로를 변경해가며 신대륙 탐험을 이어갔다. 콜럼버스의 배는 1503년 6월 마지막 항해 때 자메이카 해안에 좌초해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체류...

  • HERI
  • 2022.01.26
  • 조회수 1639

[유레카] ‘갑질 기업’의 전략적 봉쇄소송 / 곽정수

미국의 사회학자 카난과 법학자 프리그는 기업·정부·공직자 등이 공적 관심사나 쟁점에 대해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불리한 주장을 하는 것을 위축시킬 목적으로 제기하는 소송을 ‘전략적 봉쇄소송’이라고 정의했다. 전략적 봉쇄소...

  • HERI
  • 2022.01.25
  • 조회수 1479

‘사회성과연계채권’을 활용하자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언스플래쉬 ‘사회성과연계채권’(social impact bond, SIB)이란 비용이 많이 들고 다루기 힘든 사회문제를 정부, 민간기업, 비영리단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협력해 해결하는 성과 기반 보상 ...

  • HERI
  • 2022.01.17
  • 조회수 1598

[아침햇발] 8년 숙원 사회적 경제 기본법, 이번엔 마침표 찍자

‘사회적 경제 기본법’ 제정이 차일피일 미뤄지자 이 법 제정을 열망하는 사회적 경제 단체와 사회적 경제인들이 ‘시민행동’을 결성하는 등 수년간 입법 청원 활동을 벌였다. 사진은 ‘시민행동’에 참여한 사회적 경제인들이...

  • HERI
  • 2022.01.07
  • 조회수 1398

기업의 ‘임팩트 워싱’ 우려된다고? ‘임팩트’ 평가기준부터!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산출·성과보다 목표 실현하는 ‘임팩트’ 중요 임팩트 측정 어떻게 할 것인가는 향후 과제 국내·외 사회적 가치, ESG 측정법 많지만 ‘임팩트 워싱’ 현상 일어나지 않으려면 정부가 올바른 방...

  • HERI
  • 2022.01.03
  • 조회수 2165

[유레카] ‘거수기 이사회’ 종언 판결 / 곽정수

법률전문매체인 <법률신문>이 선정한 ‘2021년 주요 판결’ 중에서 기업 담합행위에 대해 이사의 책임을 잇달아 인정한 대법원과 고등법원의 판결이 당당히(?) 1위에 올랐다. 대법원은 지난해 11월 유니온스틸(현 동국제강)의 소액주...

  • HERI
  • 2022.01.03
  • 조회수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