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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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때 눈앞에서 내용을 띄워주는 프롬프터(자막 노출기)는 현대 정치의 핵심 도구다. 일상화한 도구는 부재 시 존재감이 드러난다. 2014년 4월 한-미 정상회담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미국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지 못하고 버벅거리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불쌍한 대통령, 질문이 뭐였는지 기억조차 못 하네요”라는 농담을 해 화제가 됐다.


프롬프터는 텔레비전(TV) 생방송 문화에서 생겨났다. 1950년대 이전 미국에서 연극배우와 영화배우들은 대본 암기 부담 때문에 티브이 출연을 꺼렸다. 연극과 영화에선 몇달 동안 동일한 대본을 외워 연기했지만, 티브이 생방송에서는 날마다 새 대본을 외워야 했다. 1948년 ‘20세기 폭스’ 영화사는 방송용 큐시트를 종이 두루마리로 만들어 모터로 회전시키는 장치를 개발했다. 이 장치는 1949년 ‘텔레프롬프터’로 특허가 등록된 이후 빠르게 쓸모가 알려졌고, 1952년 후버와 아이젠하워의 대통령선거전을 계기로 정치인의 필수 도구가 됐다.


프롬프터는 연설자 좌우에 있는 한쌍의 투명한 패널을 통해 연설 내용을 보여준다. 청중에게 잘 보이지 않는 좌우 패널엔 같은 내용이 투사돼, 연설자는 시선을 좌우로 옮겨가며 내용을 읽고 청중과 자연스럽게 눈맞춤하는 연설을 할 수 있다. 방송용 프롬프터는 카메라 렌즈 앞에 기울게 놓인 유리판 형태다. 특정 각도에서만 보이는 편광 반사판을 이용한 장치로, 출연자가 카메라 정면을 보면서 말할 수 있게 해준다. 지나친 의존은 부작용도 낳는다. 프롬프터가 문제를 일으키자 말문을 닫아버려 어색한 장면을 연출한 대선 후보도 최근 화제에 올랐다.


소크라테스는 <파이드로스>에서 당시 첨단기술이던 문자에 기억을 과의존할 때의 위험을 예고했다. “기억을 내부보다 외부 기호에 의존하게 되면 사람들은 적절한 가르침 없이도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것이며 실제론 무지하다 해도 지식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그들은 지혜 대신 자만심으로 가득 차 사회에 짐만 될 것이다”라는 게 소크라테스의 경고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머리는 빌리면 된다”고 했지만, 빌리기 힘든 상황도 있고 그때그때 어떤 사람과 도구를 활용할지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인의 핵심 능력이라는 것을 고장 난 프롬프터가 알려준다.


구본권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 starry9@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유레카] 프롬프터와 소크라테스 / 구본권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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