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자조 금융이 만들어내는 집단지성의 힘

admin 2021. 10. 26
조회수 232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미국 뉴욕시 저소득층 거주지역의 지역밀착신협(CDCU) 활동을 소개하는 누리집(lespeoples.org)
미국 뉴욕시 저소득층 거주지역의 지역밀착신협(CDCU) 활동을 소개하는 누리집(lespeoples.org)

‘보조금 24’라는 누리집이 있다. 국가가 제공하는 각종 지원금을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든 온라인 전용 창구다. 개인이 받을 수 있는 정부 보조금 수는 300개가 넘는데, 중앙·지방정부가 발주하는 공공사업에도 이런저런 명목의 지원금이 붙는다. 공익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일이니만큼 사업 참여자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경제 기업이 국가의 보조금을 받아 사업을 진행하는 건 좋은 일일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지원 자격만 갖추면 보조금도 받고 새로운 사업 기회도 얻으며, 부족한 운영자금을 메울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경제 기업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중독성이 강한 탓에 경계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정당한 절차와 방법으로 기회를 얻는 것인데 무엇이 문제가 될까? 본인들이 만든 상품과 서비스로 고객을 만족시키려 하지 않고, 정부가 제공하는 혜택에 안주하려는 관성이 생기는 게 문제다. 근육을 단련하지 않고 운동 경기에서 계속 좋은 성적을 거둘 수는 없다.

지난 몇 년 사이 공공과 민간 영역에 사회적 경제 기업과 소셜 벤처를 지원하는 제도와 기금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 돈은 당사자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막혔던 현금 흐름을 풀어주는 열쇠로, 기업의 성장을 견인하는 촉매제로 기능했을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지원금으로 인해 근육량이 줄어드는 퇴보가 일어났을 수도 있다. 보조금과 금융은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돈을 빌리거나 투자를 받으면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긴다. 책임 의식과 상환 의지는 기업을 성장시키는 거름이 된다. 보조금에 의지해 살아가는 기업이 얻을 수 없는 튼튼한 근육을 만들어 준다. 무리한 욕심으로 과다한 부채를 짊어지는 건 잘못이지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금융을 적절히 활용하는 건 기업의 성장을 위한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정부의 지원금은 상수가 아니다. 정치적 환경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외부의 지원 없이 작동되는 자조·연대기금이 필요한 이유다. 자신들의 힘으로 일구어낸 것보다 단단한 건 없다. 하지만 구성원들 다수가 취지와 목적에 동의하더라도, 돈을 모으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왜 그럴까?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절실하지 않고, 더 편한 길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무담보 소액대출(마이크로크래딧) 사업의 효시라 일컬어지는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 모델은 집단대출 방식으로 운영된다. 돈은 개인에게 빌려주지만, 상환 책임은 집단(5인)이 함께 책임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덮어놓고 돈만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공동 책임이라는 방식이 주는 유대와 긴장감을 통해 구성원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형성되도록 한 것이다.

자조·연대기금은 단순한 돈뭉치가 아니다. 어려운 가운데 각자 힘들게 번 돈을 모아 기금을 만들면 공동체 식구들 사이에 책임감과 동료애가 높아진다. 소중하게 만든 돈이니만큼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생각, 다른 구성원들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된다는 의식, 기금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터득한 경험과 지혜가 축적되어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 만들어진다.

미국의 저소득층 밀집 지역에서 일하는 지역밀착 금융기관들(CDFIs)의 고객은 신용점수가 바닥인 사람들이 대다수다. 주류 금융회사들이 애지중지하는 신용평가 방식으로 보면, 절대로 돈을 빌려주어서는 안 되는 이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회수율은 경이로운 수준이다. 이유가 뭘까? 집단지성에 의한 공동체 의식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소중하면 아끼게 되고, 잘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긴다.

금융은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해치는 흉기가 될 수도 있고 우리의 삶을 지켜주는 방패가 될 수도 있다. 정치가 싫다고 외면하면 시민들의 삶이 위험해지듯, 금융이 어렵다고 멀리하면 돈에 끌려다니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자조 금융이 필요한 이유다. 파란 약을 먹을지, 빨간 약을 먹을지의 선택은 공동체와 구성원들의 몫이다.

문진수 사회적금융연구원장
진실을 후원해주세요
용기를 가지고 끈질기게 기사를 쓰겠습니다.
여러분의 후원이 우리 사회에 드리운 어둠을 거둡니다.
한겨레에서 보기: 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1016253.html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사회투자 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역할

사회적 금융 원금 회수 원칙으로 사회가치 창출이라는 기금 취지 훼손 손실 문제 해결은 정책의 영역 사회혁신 조직에 돈이 흐르도록 정부는 사회투자 촉매자 역할해야 언스플래쉬 “ 빌려준 돈은 반드시 회수해야 한다. ” 대...

  • HERI
  • 2021.12.02
  • 조회수 11

[유레카] 재벌의 ‘아빠 찬스’ / 곽정수

대선 출마를 선언한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가 최근 우리나라가 ‘청년층의 무덤’으로 전락했는데 여야 대선 후보들은 나랏빚으로 환심을 사겠다는 무책임한 대책만 내놓는다고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올해 상반기 청년층(15~29살)의 ...

  • HERI
  • 2021.11.25
  • 조회수 188

[유레카] 프롬프터와 소크라테스 / 구본권

말할 때 눈앞에서 내용을 띄워주는 프롬프터(자막 노출기)는 현대 정치의 핵심 도구다. 일상화한 도구는 부재 시 존재감이 드러난다. 2014년 4월 한-미 정상회담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미국 기자의 질문에...

  • HERI
  • 2021.11.24
  • 조회수 220

수익 잔치 은행은 ‘생산적 금융’했나?…시민이 대안금융 열자

임팩트 투자 플랫폼, 사회의 미래에 투자하는 문화 조성 사회 가치 창출하는 프로젝트·사업에 돈의 흐름 이어줘 임팩트투자 플랫폼 비플러스 누리집(benefitplus.kr) “내 돈이 지구 환경을 지키는 데 쓰였다니 기쁘네요.” 온라인...

  • HERI
  • 2021.11.22
  • 조회수 121

“평생기술일 줄 알았는데…” 카센터 사장님의 ‘투잡’

인공지능과 자동화 시대에 안정적인 일자리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무어의 법칙’은 디지털 세상의 속도와 변화의 폭을 규정한다. 약 24개월마다 반도체의 집적도가 2배가 된다는 이 법칙은 기술 발전의 속도가 지수함수라...

  • HERI
  • 2021.11.15
  • 조회수 376

지역에 사회적 금융 전문 중개기관을 만들자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지역에 사회적 금융 중개기관 설치해 사회 가치 실현하는 기업과 사업에 투자한다면 지역 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지역 밀착 금융 기관으로 발돋움 할 수 있어 수도권은 진공청소기처럼 사람과 돈...

  • HERI
  • 2021.11.05
  • 조회수 534

[아침햇발] 산업화·민주화·탈탄소화 / 이봉현

문재인 대통령이 2일(현지시각) 영국 글래스고 스코틀랜드 이벤트 캠퍼스(SEC)에서 열린 국제메탄서약 출범식에 참석,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이봉현|경제사회연구원장, 논설위원 대한민국은 ‘네다바...

  • HERI
  • 2021.11.05
  • 조회수 230

[유레카] 최태원과 기업가정신 / 곽정수

에스케이(SK)에서는 지난 10월 말 올해를 마무리하는 시이오(CEO) 세미나가 끝난 뒤 격론이 벌어졌다. 최태원 회장이 폐막 연설에 ‘2030년 기준 전세계 탄소 감축 목표량 210억톤 가운데 1%인 2억톤을 기여하겠다’는 약속을 ...

  • HERI
  • 2021.11.04
  • 조회수 340

[유레카] 항공기 사고와 소프트웨어 사고 / 구본권

1983년 9월26일 밤 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소련 핵전쟁 관제센터에 경보가 울렸다. 미국으로부터 소련 본토로 5기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날아오고 있다는 경보였다. 핵탄두 탑재 전폭기를 24시간 공중 체류시키며 즉각적인 ‘상호확...

  • HERI
  • 2021.11.03
  • 조회수 200

자조 금융이 만들어내는 집단지성의 힘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미국 뉴욕시 저소득층 거주지역의 지역밀착신협(CDCU) 활동을 소개하는 누리집(lespeoples.org) ‘보조금 24’라는 누리집이 있다. 국가가 제공하는 각종 지원금을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든 온라...

  • admin
  • 2021.10.26
  • 조회수 232

[유레카] 법조공화국 / 곽정수

한국 근대사에서 변호사가 처음 등장한 것은 구한말이다. “1906년 법무령 제4호에 의해 홍재기 등 3명이 변호사 인가증을 받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00년 뒤인 2006년 변협에 등록한 변호사가 1만명을 돌파했다. 현재...

  • HERI
  • 2021.10.14
  • 조회수 275

[유레카]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에 실린 것 / 구본권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가 오는 21일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발사될 예정이다. 2010년 개발이 시작된 누리호는 설계, 제작, 시험, 발사 운용 등 모든 과정이 국내 기술로 이뤄졌다. 로켓 1단부는 75t급 액체엔진 4기를 묶어...

  • HERI
  • 2021.10.14
  • 조회수 309

진짜와 가짜 ‘임팩트 기업’ 구별하려면?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사회적 가치 추구하는 ‘진짜’ 기업 찾으려면 ‘임팩트’ 평가하는 객관적 척도 필요 진정성 있는 투자·중개기관이 나서 진짜에 투자할 수 있는 환경 만들어야 주거, 환경, 보육 등 다양한 사...

  • HERI
  • 2021.10.07
  • 조회수 262

로지, 미켈라…사고 안치는 ‘가상인간’ 모델계 대세될까

AI ‘버추얼 인플루언서’ 본격화 가상세계 익숙한 젊은층에 인기 명품모델 기용되며 높은 수익성 “과거엔 기술이 사람 따라했지만 현재는 사람이 가상인간 모방” “줄리엣·심청의 불멸은 스토리덕” 국내에서 모델로 활동하고 ...

  • HERI
  • 2021.10.04
  • 조회수 419

[HERI 칼럼] 해운사 담합 면죄부 법 / 곽정수

곽정수 선임기자 미국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3년. 루스벨트 행정부는 위기 극복을 위한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산업별로 ‘공정경쟁 협약’을 맺을 수 있는 ‘국가산업부흥법’을 제정했다. 과도한 시장경쟁을 막는다는 미명 아래 기...

  • HERI
  • 2021.10.04
  • 조회수 323

서울시 사회투자기금을 둘러싼 논쟁을 바라보며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사회적 경제 기업, 소셜벤처 지원하는 지자체 기금 손실 보전 장치 부재·융자 중심 운용 문제 있지만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 하는 기업 성장 도와 엑셀러레이터가 투자자로 참여하거나 민간기...

  • HERI
  • 2021.09.23
  • 조회수 462

[유레카] 뉴 브랜다이즈 운동 / 곽정수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jskwak@hani.co.kr ‘뉴 브랜다이즈 운동의 3총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임명한 리나 칸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장, 조나단 캔터 법무부 반독점국장(지명자 신분), 미국 정부의 경제정책...

  • HERI
  • 2021.09.15
  • 조회수 548

[유레카] 안전하지 않은 ‘안전 극장’ / 구본권

20년 전 일어난 ‘9·11 테러’는 민간 항공기가 최고의 테러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확인시키며 항공여행의 풍경을 완전히 바꿨다. 강화된 몸수색과 알몸 스캐너를 거쳐야 하고 액체는 휴대할 수 없게 됐다. 미국의 보안 ...

  • HERI
  • 2021.09.15
  • 조회수 416

살아있는 실험의 장이자 오래된 미래 ‘공제’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조상들의 상부상조 전통 담긴 ‘공제’ 정부·시장 주도 사회보장체계 형성되며 밀려나 2010년 소비자 생협 공제사업 법적 근거 마련에도 정부 무관심으로 10년간 발 묶여 소비자 피해 막기 위한...

  • HERI
  • 2021.09.09
  • 조회수 377

허드렛일 처리 ‘인간형 로봇’ 꿈…100년만에 실현될까?

일론 머스크 “내년에 시제품 공개” 성인 몸집에 짐 들고 걷는 기능도 “지루하고 위험한 일 사람대신 처리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로봇” 튜링 “사람닮은 로봇 어리석은 일” ‘범용’대신 기능별 로봇이 ‘대세’ 테슬라...

  • HERI
  • 2021.09.06
  • 조회수 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