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뉴스
이탈리아 시민경제학자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
경제와 시장, 행복에 관한 성찰 담은 책 두권 펴내
“근대경제학이 ‘무상성’ 의 존재 외면한 것이
오늘날 만연한 사회·경제적 위기와 불안의 근원”

‘인간적 경제’, ‘모두를 위한 경제’를 주창해온 이탈리아 시민경제학자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의 책 두 권이 최근 국내에 잇따라 번역 출판됐다.
‘인간적 경제’, ‘모두를 위한 경제’를 주창해온 이탈리아 시민경제학자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의 책 두 권이 최근 국내에 잇따라 번역 출판됐다.

장기화하는 코로나바이러스 시대 지구촌 곳곳에서 기존 주류경제 시스템의 파산 선고와 근대경제학에 대한 준열한 비판이 들려온다. 동시에 임계점을 넘고 있는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과 분열 현상에 대한 대안 제시가 활발하다. 그런 가운데 지난 세밑 <뉴욕타임스> 기사(2020년 12월 29일치)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자본주의의 결점을 완화하는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협동조합”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1950년대 중반 이래 현재까지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몬드라곤 협동조합그룹을 소개하고 있다. 스페인 북부 척박한 산골짜기에서 출발한 몬드라곤은 제조업·신용조합·소비조합·교육연구 부문이 유기적으로 결합한 기업집단이다. 자국에서 7만명 이상을 고용하고, 연 매출이 약 16조원에 달하는 몬드라곤의 주인은 회장이나 대주주가 아니라 모든 직원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바로 자신들의 품위 있는 일자리와 건전한 지역사회 공동체 유지이다. 한국에서는 이미 1992년에 번역·출간된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라는 책과 2011년 3월 <한국방송>(KBS)에서 방영된 <스페인 몬드라곤의 기적>을 통해 이 특별한 대안 기업의 현장이 생생하게 소개된 바 있다.

미국의 자유주의 성향 주류 신문이 새삼스럽게 ‘글로벌 자본주의 방식에 대한 흥미롭고 잠재적인 대안’이라고 비주류 협동조합그룹의 성공 사례를 뒤늦게 보도한 이유는 무엇일까? 워싱턴의 경제정책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미국 350대 기업의 최고 경영자는 일반 직원보다 약 320배나 더 많은 급여를 받지만, 몬드라곤 경영진 급여는 최저임금의 6배를 넘지 못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서 스페인의 실업률이 26% 이상으로 치솟았을 때, 몬드라곤에서는 실업률이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임금을 조금씩 낮추고 문 닫은 회사 직원들을 교육해 다른 협동조합 기업에 전환 배치함으로써 정리해고를 막았기 때문이다. 몬드라곤은 평소 경제위기에 대응하여 연대기금을 적립하고 ‘사람을 해고하지 않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경제위기가 닥치면 대주주와 최고경영진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가장 먼저 직원부터 해고하는 자본주의 기업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작년 4월 코로나 확산 방지 명분으로 스페인 정부는 에레카의 공장 세 곳 중 두 곳을 닫으라고 명령했다. 생산 관리자 요안나는 자기가 다니던 회사 문이 닫히는 힘든 경험을 했지만, 수입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위기 극복을 위한 회사의 접근 방식을 신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협동조합 체제는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었습니다(The cooperative system has given us peace of mind).”


바로 이것이다! 고립과 단절이 강요되는 상황에서 연대의 공동체가 얼마나 따뜻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절감하는 우리 시대에 ‘마음의 평화’만큼 고귀한 것이 또 있겠는가? 그렇게 많은 경제학자가 이론적으로 정당화해 온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과연 공동체의 안녕과 개인의 평온을 보장해 주었던가? ‘경쟁과 혁신을 통해 풍요와 자유를 선사하는 자본주의’라는 신화가 얼마나 더 유지될 수 있을까? 최근 ‘자본주의의 재구축’을 주장하는 논자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이번에도 우리는 백신으로 땜질하고 인공지능으로 도색 처리한 낡은 체제를 ‘포스트 코로나’에 도래할 신세계인양 착각하게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그 기원을 찾는 경제학의 본래 관심은 사람들의 행복이었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일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서구의 근대경제학은 인간의 행복을 개인의 물질적 향유의 경쟁적 증가로 대체해버렸다. 화폐로 계산되지 않고 손익을 따지지 않는 공감과 배려, 무상성(gratuitousness)의 나눔으로 풍요로워지는 인간관계는 무시되었다. 그 결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타인은 지옥’이 되었다.

최근에 한국어로 번역된 <콤무니타스 이코노미>와 <숲과 나무>는 ‘인간적 경제’, ‘모두를 위한 경제’를 주창하는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의 저작이다. 이탈리아 시민 경제학의 전통과 가톨릭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경제와 시장이라는 개념, 그리고 인간의 행복에 관한 근본적 성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자본주의가 경영과 조직 운영의 방식으로 구현되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장은 (고전 경제학자들이 기대했던 바와는 완전히 거꾸로) 사람들에게 구원이 아니라 상처를 주는 사회적 메커니즘으로 전락했다. 과거에 개인의 자유를 제약했던 권위주의적 공동체를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사하겠노라고 약속한 시장이 ‘계약’이라는 이름의 족쇄를 선물한 것이다.

브루니가 보기에 자본주의 제도가 고안해 낸 그 족쇄는 개인의 자유, 선택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성과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이다.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이 열광하는 보상체계를 이용해 자본주의 기업들은 인간의 영혼까지 통제하고, 그 결과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행동과 자유의 영역이 조직적으로 축소된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제도나 기업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합적이며 풍요로운 존재이다(<숲과 나무> 38~40쪽). 심지어 기업까지 포함하여 우리의 구원이 깃들 곳은 영혼이고,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영혼은 완전히 통제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이제 시장에서 질린 사람들은 시장 밖에서 위로와 안도감, 곧 축복을 찾아 나선다. 우리가 사회·경제 제도로서 시장을 완전히 버릴 수 없다면(시장과 자본주의는 구분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기업가들과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의 빈약한 생각과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브루니의 출발점이고, 우리가 미래로 가는 대안을 모색하면서 반드시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지점이다.

브루니의 핵심 논지는 오늘날 사회·경제적 환경에 만연한 위기와 불안의 근원을 근대경제학이 놓쳤다는 것이다. 곧 인간관계의 결속을 가능하고 풍요롭게 하고, 생산조직과 시장의 작동을 뒷받침하는 ‘무상성’의 존재를 시야에서 상실했다는 지적이다.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나눔과 선물, 수치와 그래프로 표현되지 않는 인간의 마음과 행동은 시장에서 존재할 공간이 없다는 인식, 설령 그런 측면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엄밀하게 측정될 수 없다는 편협한 생각이 근대 발전모델의 근저에 놓인 ‘학문적 사고’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사회적 관계성의 가치를 되찾아 오자는 것이다. 관계재는 사람들 사이의 만남, 기업과 사회의 만남의 결과이고, 공동선의 추구라는 지향을 갖는다. 인간이 살아가는 공통의 땅, 공통의 기반으로서 콤무니타스(communitas) 즉, 공동체적 삶의 공간을 되찾아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자유가 제약되는 것을 막고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한 ‘중재자’로서 시장의 역할이 필요하다. 브루니는 “시장이나 계약이 없는 사회는 어엿한 문명사회가 아니지만, 동시에 인간관계를 단지 시장이나 계약으로만 관리하려는 사회는 문명 수준이 더더욱 낮아질 수 있음을 확신한다”(<콤무니타스 이코노미> 36쪽)고 말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과 대지의 근본적 무상성을 전제하는 브루니 발상의 참신함은 경제학이 무엇보다 먼저 인간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진정한 인간관계에는 상처(wound)와 축복(blessing)이라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직관이다. 타자와 만난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어느 정도의 상처를 수반하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 존재의 불가피한 숙명이다. 곧 상처는 근원적으로 회피될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하면 최소화하면서 감수하고, 그것을 공유하면서 서로 회복하고 공감과 연대의 관계 속에서 축복을 얻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사랑을 말하는 경제학’(<콤무니타스 이코노미> 4장)이라는 발상조차도 접한 적이 없다. 따라서 이것들은 전형적인 경제학책이 아니다. 인간과 경제, 공동체와 행복에 관한 아포리즘으로 빛나는 이 책들은 경제를 소재로 삼고 있는 사회윤리학, 또는 사회연대경제의 인간학 탐색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제 물질의 경제학은 마음의 사회학, 감정의 심리학과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되고, 나아가 사랑의 기술로까지 승화될 수 있다면 최선일 것이다.

김창진 성공회대 교수(사회적경제대학원장)


한겨레에서 보기: ‘모두를 위한 경제’의 열쇠, 콤무니타스와 ‘중재자’로서의 시장 : 헤리리뷰 : 경제 : 뉴스 : 한겨레 (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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