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사회
[더 나은 사회]
새해 기획 | 균형발전, 도시혁신이 답이다
- ② ‘산업도시의 대변신’ 맨체스터·셰필드
‘최초의 산업도시’ 자부심 맨체스터
제조업 몰락, 한때 도시 기반 무너져
미디어시티 등 산업구조 재편 한창
북서부 거점 역할, 지역 균형의 버팀목

‘철강 도시’ 셰필드도 혁신에 성공
인구 다시 늘어나고 실업자는 감소세

지난 12월10일 겨울비가 내리는 맨체스터 ‘미디어시티’ 일대 전경. 맨체스터운하 북쪽 솔퍼드 지역에 있던 81만㎡ 넓이의 버려진 땅은 2010년대 들어 맨체스터 지역경제를 지탱하는 디지털미디어 산업 클러스터로 탈바꿈했다.
지난 12월10일 겨울비가 내리는 맨체스터 ‘미디어시티’ 일대 전경. 맨체스터운하 북쪽 솔퍼드 지역에 있던 81만㎡ 넓이의 버려진 땅은 2010년대 들어 맨체스터 지역경제를 지탱하는 디지털미디어 산업 클러스터로 탈바꿈했다.

도심 한복판을 막 벗어난 두 량짜리 노란색 트램(경전철)은 갑자기 속도를 줄이더니,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운하의 물길과 나란히 앞으로 나아갔다. 겨울비가 세차게 몰아치는 차창 밖으론 물기를 머금은 붉은색 벽돌의 오래된 건물들이 빼곡했다. 익스체인지 부두, 솔퍼드 부두, 하버시티…. 운하와 관련 있을 법한 이름을 지닌 정거장이 이어졌다. 몇 분이 흘렀을까. 한순간 눈앞에 펼쳐진 건 저마다 독특한 모양을 한 초현대식 대형 건물 숲. 어느새 승객들은 옷깃을 단단히 여민 채 마지막 정거장을 종종걸음으로 빠져나갔다. ‘영국미디어시티’(MediacityUK). 지난 12월10일 찾아간 그곳엔 ‘또 다른’ 맨체스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81만㎡ 땅에 들어선 산업 클러스터

“흔히 당신이 알고 있는 과거의 맨체스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맨체스터다. 아마 분위기가 많이 다를 거다.” 미디어시티가 맨체스터 도시혁신의 상징과도 같은 사례라며 들려주던 맨체스터시 도시계획팀 에릭 바워의 얘기는 그다지 과장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육중한 방송사 건물들. 공영방송 비비시(BBC) 로고를 단 건물은 끝없이 이어졌고, 지역방송 아이티브이(ITV) 건물에서 새어 나오는 화려한 불빛은 비까지 내려 음산한 겨울 분위기를 그나마 달래주는 듯했다. 병풍 치듯 높이 솟은 대형 빌딩들 사이사이엔 잘 가꿔진 녹지가 주변 운하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맨체스터운하 북쪽에 맞닿은 미디어시티엔 저마다 독특한 모양을 한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맨체스터운하 북쪽에 맞닿은 미디어시티엔 저마다 독특한 모양을 한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항구도시 리버풀과 맨체스터를 잇는 맨체스터운하 북쪽의 솔퍼드(Salford) 지역 일대에 대공사가 시작된 건 2000년대 후반. 1단계 개발 작업이 마무리된 게 2011년의 일이다. 이곳은 1982년 도크가 폐쇄된 뒤 20년 넘게 사실상 버려진 땅이었다. 19세기 산업도시의 흔적을 간직한 땅이 ‘기술과 혁신, 창의성의 허브’로 재탄생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2004년 찾아왔다. 비비시가 런던의 본사에 지나치게 집중된 조직 역량을 대대적으로 분산하겠다는 마스터플랜을 발표한 일. 당시 비비시는 영국 북서부에 자리잡은 도시 맨체스터를 핵심 거점으로 키우겠다며 약 2천명 규모의 인력을 런던에서 맨체스터로 재배치하는 계획도 함께 공개했다. 유유히 흐르는 물길이 어우러진 솔퍼드 지역은 거대한 실험 장소로 낙점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로부터 10여년. 81만㎡ 넓이의 땅은 어느덧 디지털미디어 산업 클러스터로 탈바꿈한 상태다. 1만2천㎡ 넓이의 메인 빌딩을 포함해 유럽 최대 규모의 스튜디오 등 각종 시설(4만2천㎡)과 사무동(3만1천㎡)을 거느린 비비시 타운은 미디어시티의 무게중심이다. 2013년엔 아이티브이도 이곳에 새 둥지를 틀었다. 솔퍼드대학은 콘텐츠산업 현장과 밀접하게 연결된 연구 기지 노릇을 톡톡히 해내는 중이다. 스웨덴의 통신장비 제조업체 에릭슨, 다국적 식품업체 켈로그 등 미디어시티를 터전으로 삼은 글로벌 대기업들도 여럿 있다. 관련 산업의 크고 작은 8천여 기업이 만들어낸 일자리만 약 9만명. 연간 창출해내는 부가가치 규모는 41억파운드(약 6조3천억원)에 이른다. 런던을 빼면 가장 높은 숫자다. 북서부 거점도시 맨체스터의 지역경제를 탄탄하게 지탱하는 기둥인 셈이다.

미디어시티 입구에 설치된 안내판.
미디어시티 입구에 설치된 안내판.

‘트래퍼드 파크’의 몰락과 변신

도시혁신의 바람이 느닷없이 찾아온 건 아니다. ‘2010년대 미디어시티’는 그보다 약 20년 앞선 ‘1990년대 트래퍼드’로부터 맨체스터에 흐르는 혁신의 디엔에이(DNA)를 이어받았다고 보는 게 맞다. 1277㎢의 땅에 280만명이 모여 사는 맨체스터 앞엔 ‘최초의 산업도시’라는 수식어가 훈장과도 같이 늘 따라붙는다.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산업혁명의 발상지이자 중심 도시였던 까닭이다. 옛 도심 곳곳엔 산업혁명 당시의 면방직 산업과 관련한 유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지만 맨체스터에도 아픈 기억은 있다. 과거 도시 경제를 떠받치던 제조업이 빠르게 몰락하면서 1980년대 들어 한때 도시 전체의 산업 기반이 완전 붕괴했기 때문이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가 세계 최초의 계획 산업단지라 불리는 ‘트래퍼드파크’의 몰락이다. 맨체스터운하 남쪽의 트래퍼드 지역에 자리잡은 트래퍼드파크는 금속과 식품, 화학, 자동차 등 다양한 분야의 제조업체가 둥지를 튼 20세기 맨체스터 경제의 심장이었다. 최전성기인 1950년대엔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7만5천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시 정부는 1987년 트래퍼드파크개발공사(TPDC)를 설립하고 고부가가치 위주의 첨단 산업으로의 재편을 목표로 한 트래퍼드파크 재생에 사활을 걸었다. 앤지 로빈슨 맨체스터상공회의소 대표는 “산업구조 리모델링 덕에 트래퍼드파크는 현재 500여 기업에서 3만5천명이 일하는 터전으로 되살아났다”며 “더욱 튼튼한 경제 기반을 다지기 위해 기업과 노동자, 지역사회가 머리를 맞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2월9일 셰필드 도심의 하워드 거리 주변에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과거 ‘철강 도시’라 불리던 셰필드는 원도심 재생사업을 벌여 지역경제 활성화의 지렛대로 삼고 있다.
지난 12월9일 셰필드 도심의 하워드 거리 주변에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과거 ‘철강 도시’라 불리던 셰필드는 원도심 재생사업을 벌여 지역경제 활성화의 지렛대로 삼고 있다.

도심 재생에 성공한 ‘이웃 도시’ 셰필드

전통적 산업도시에서 고숙련 ‘지식 도시’로 빠르게 탈바꿈하고 있는 맨체스터의 변신은 이웃한 도시 셰필드의 경험과도 닮은 구석이 많다. 사우스요크셔의 주도인 셰필드는 ‘철강 도시’란 별명이 붙을 만큼 산업혁명 이래 영국 제조업의 한 축을 맡아왔다. 하루 앞서 9일 찾아간 셰필드 도심 곳곳엔 한때 세계 철강산업을 선도하던 도시의 위상을 짐작하게 해주는 오래된 건물과 유적이 즐비했다. 문제는 20세기 중후반 들어 전통적 제조업의 경쟁력 약화라는 태풍이 셰필드도 비껴가지 않았다는 사실. 1971년 당시 전체 노동인구의 40%가 철강산업에 몸담은 현실에서 철강산업의 몰락은 도시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해를 정점으로 도시 인구는 내리막길을 거듭했다.

도시의 틀을 완전히 바꾸려는 노력은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됐다. 시 정부와 민간기업 등이 참여하는 도시혁신 프로젝트 ‘셰필드 퍼스트 파트너십’은 혁신과 창조를 도시 재개조의 열쇳말로 삼았다. 도심 재생은 그중에서도 주요 과제였다. 이날 도심 동쪽의 셰필드역에서 시프광장, 하워드거리, 핼럼정원, 밀레니엄갤러리를 차례로 거치며 셰필드대학까지 걸어가는 동안 역사와 창조,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흥미진진한 풍경이 계속됐다. 도심 좌우로 뻗은 이 길은 ‘골드루트’란 이름이 붙은 코스로, 셰필드 도심 재생의 핵심 프로젝트로 꼽힌다. 이 밖에도 도심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비스듬하게 이어지는 ‘스틸루트’(철강루트)는 과거 철강산업의 흔적을 창의적인 문화콘텐츠로 변모시킨 사례로 이름 높다.

이런 성과 때문일까. 현재 셰필드는 ‘비전 2028’에 따라 도심 남북을 ‘지식루트’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이 한창이다. 앤절라 가워 셰필드시 도심관리팀 담당자는 “도시의 여러 대학과 사이언스파크를 묶어 지식도시로 한 단계 더 도약하려는 뜻이 담겼다”고 설명했다. 거듭된 혁신의 효과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산업구조가 바뀌면서 도시의 전체 일자리 중 전문직 일자리 비중은 30%를 웃돈다. 2010년대 내내 실업자 수는 감소세를 이어가는 중이다. 반면 30년가량 줄어들기만 하던 도시 인구는 2001년부터 증가세로 돌아서 1990년대 중반 63만명대에서 2019년 기준 72만5천명으로 불어났다. 여러모로 맨체스터의 오늘과도 겹친다.

‘최초의 산업도시’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맨체스터 옛 도심엔 산업혁명 당시의 면방직 산업 관련 건물과 유적이 즐비하다. 사진은 맨체스터와 리버풀을 잇는 철도 종착점 건물을 개조해 문을 연 과학기술박물관에 전시된 옛 방직기.
‘최초의 산업도시’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맨체스터 옛 도심엔 산업혁명 당시의 면방직 산업 관련 건물과 유적이 즐비하다. 사진은 맨체스터와 리버풀을 잇는 철도 종착점 건물을 개조해 문을 연 과학기술박물관에 전시된 옛 방직기.

협동조합·참정권…혁신의 DNA를 살려라

경제연구기관들은 특히 맨체스터 지역경제가 2035년까지 연평균 2.2%의 안정적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내다본다. 영국 전체 성장률 전망치(1.8%)보다 높은 수치다. 같은 기간 일자리도 20만명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영국 북서부 지역 경제력의 40%를 차지하는 거점도시의 잠재력이자, 영국 전체를 통틀어서도 경제력의 지역 균형을 맞출 수 있는 힘이다. 금융업과 관광산업에 치우친 런던과 에든버러와 달리, 전통적 제조업 도시였던 맨체스터의 산업 포트폴리오가 비교적 다양하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오늘 맨체스터가 하는 일을 세상은 내일 하게 될 것이다.’ 19세기 중반 영국 총리를 지낸 보수 정치인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남긴 이 말은 당시 세계 최고의 선진 문명 도시였던 맨체스터의 위상과 자부심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지금껏 남아 있다. 단지 과학기술과 경제력만이 아니다. 협동조합 운동, 여성 참정권 등 인류가 경험한 숱한 사회혁신 중엔 맨체스터에서 신호탄을 쏘아올린 게 한둘이 아니다. 과거로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바로 그 혁신의 디엔에이가 ‘최초의 산업도시’를 ‘한발 앞선 미래도시’로 성큼 나아가게 만든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맨체스터·셰필드/글·사진 최우성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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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에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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