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사회

[더 나은 사회]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기고
일본 국민 다수는 정치에 극히 무관심
우릴 옥죄던 ‘내면적 식민성’ 깨져
일본은 수직적, 종속적 사회구조
근대화를 견인해온 관료조직이 혐오를 부추겨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올해 광복절을 앞두고 한―일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비록 경제 갈등의 형태로 촉발되긴 했으나, 그 뿌리엔 오랜 역사적 갈등이 놓여 있다. 1990년대 이후 일본 사회 우경화와 맞물려 고조되고 있는 혐한 분위기의 문화적 기원에 대한 관심도 높다. 반면 우리 사회 내부의 과도한 ‘애국주의’ 움직임에 대해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일 갈등을 우리 사회 내부를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린다. 일본 현대사를 오랫동안 천착해온 전문가 2인의 외부 기고와 관련 토론회에서 나타난 논의들을 소개한다.


개인적 경험 한가지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처음 일본에 유학을 갔던 1996년, 충격이 컸다. 내가 가진 삼성 노트북이 고장 나 재팬삼성 본사에 찾아갔다가 과장쯤으로 보이는 사원한테 이런 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50년, 아니 영원히 일본을 추월하지 못합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한류붐이 일어나고, 한국 경제는 핸드폰과 반도체 등으로 일본을 추월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아베 정부가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것으로 시작된 두 나라의 경제갈등 과정을 지켜보면서 세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두 나라 갈등의 문화적 배경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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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일본을 영원히 추월할 수 없다는 ‘내면적 식민성’, 일본으로부터 부품을 제때 공급받지 못한다면 우리가 제품을 생산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깨졌다. 기초과학과 중소기업 활성화 움직임은 곳곳에서 빠르게 일고 있다.


둘째,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고 촛불혁명으로 민주주의도 챙겼다는 안도감이 깨지고, 모두에게 다시금 팽팽한 긴장감이 형성됐다. 문화계만 놓고 봐도 알 수 있다. 다소 의견 차이를 보였던 국제펜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한국작가회의가 연합해 한목소리로 ‘아베 경제 도발에 반대하는 한국작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아베 덕분이라 해야 하나.


셋째,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시민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 내가 아는 한 일본인 연극인은 “아베는 바카야로!”라며 노골적으로 욕을 해댔다. 늦은 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내게 젊은 일본 시인이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다음날 노시인인 혼다 히사시 선생은 헤어지는 자리에서 말했다. “이 악한 세력에 대항해 우리 작가는 꽃을 들고 싸워야 합니다.” 일본의 문인들도 역사를 고민하며 이번 사태를 몹시 괴로워한다. 두 나라의 깨어 있는 시민들의 움직임이다.


이번 일로 일본이 정치와 종교가 하나로 된 특이한 ‘제정일치 사회’란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천황제를 떠받들고 야스쿠니 신사를 모시는 자민당과 창가학회에 토대를 둔 공명당이 여당을 이룬다. 아베 정권은 보수 본류에서 갈라져 나온 극우 보수 방류로, 전쟁으로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노골적으로 개헌을 주장하는 논거다.


일본 사회는 상하관계가 확실한 종사회(縱社會)다. 가장 위에는 천황, 가장 아래는 천민이 위치하는 등 수직적 관계가 견고히 형성되어 있다. 이 종속적 구조를 따르지 않는 거주자는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된다. 우리 정부 관리의 방문을 홀대하는 모습에서 이러한 일본인의 속내가 그대로 드러났다. 아베는 이러한 종적 사회적 특성과 종교성을 잘 이용한다. 일본 특유의 종교적인 관료조직은 일본 근대화를 견인해왔지만 타자를 모멸하는 혐오 사회의 원인이기도 하다.


일본은 <동물농장>이나 <1984> 같은 나라가 아니다. 외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처럼 진실을 감춘 화려한 나라다. 이 멋진 신세계에서 국민 다수는 정치에 무관심하다. 나머지 50% 정도의 국민을 상대로 자민당 공명당 연립정부에 속한 열성적 신도들이 여론조사를 좌우한다. 결국 일본인의 70%가 한국을 향한 무역 제재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는, 무관심층을 빼면 전체 일본인 20~30% 정도의 생각이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


아베 정책을 거부하는 일본 지식인들은 현재 두 군데 ‘거점’을 중심으로 아베 총리에 반대하는 사이트를 만들어 서명에 나서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덕에 한-일 국제연대도 훨씬 쉬워졌다. 전자우편과 페이스북 등으로 한국과 일본 작가가 수시로 의견을 나눈다.


이제 담담하게 경제의 체력을 키우고, 즐겁게 한-일 시민연대, 한-일 노동자연대에 나설 때다. 표를 의식하는 아베 체제는 두 나라 시민이 연대하는 모습에 긴장할 것이다. 만일 9월까지 긍정적인 변화가 없다면 ‘아베 정책을 우려하는 한·일 작가의 성명서’도 발표될 것이다.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라는 루쉰의 말처럼 열심히 우리의 길을 가면 될 뿐이다. 지금 두 나라 시민들은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간다.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새로운 길, 이 모든 일이, 그래 아베 덕분이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heri_review/90552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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