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1537년 로마 교황 바오로 3세는 한 칙령을 내린다. “인도인이나 흑인, 아메리카 대륙의 토착민들도 인간이다.” 이 칙령이 시사하는 바는 당시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한동안 유럽인들에게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차별과 지배, 정복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오랜 야만의 역사는 1789년 마침내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프랑스 인권선언을 계기로 전환을 맞는 듯했지만, 현실과 선언의 큰 간극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1939년 독일의 나치는 ‘T사 계획’을 실행한다. 이 계획은 집단 살인 명령이었다. 의사가 치유 불능이라고 판명한 정신장애인 등 환자에 대해 살인을 허가하고 실행하는 안락사 계획이었다. 이로 인해 수년 사이에 약 30만명의 정신병자, 유전성 질환자가 학살됐는데, 복지시설 입소자도 포함됐다. 이때의 살해 방법이 가스였다. 유대인 학살로 유명한 나치의 가스실은 애초 독일 정신장애인 등을 죽이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다.


복지는 본질적으로 가치에 기반을 둔다. 사회적 자원을 능력보다 필요에 따라 나눠야 한다는 공평의 가치, 인간은 함께 힘을 합해 사는 게 바람직하다는 연대의 가치, 빈곤 퇴치가 사회통합의 토대라는 통합의 가치 등은 복지 발전의 동력이었다. 가장 원천적인 복지 가치는 모든 인간이 똑같이 존엄한 존재라는 인간의 존엄성 사상이다. “신분이나 직업, 경제상태나 조건, 사상이나 민족, 피부, 성별, 연령 등을 이유로 누구든 차별받거나 인간성이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치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한겨레> 인터뷰에서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겠다”고 밝힌 것은 이런 복지의 근본 가치에 비추어보면, 주무 장관으로서 당연한 조처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가치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생활수준을 보장할 때” 의미를 띠는 것이고, 복지국가는 이를 국가의 책임으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이행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최저생계비 이하로 살아가는 인간의 고통을 방치하고서 ‘포용적 복지’를 주창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참고: <사회복지의 사상과 역사>, 박광준 지음)


이창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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