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뉴스
파주 교하도서관의 <마을에서 예술하다> 전
이웃으로 촘촘히 엮인 인연으로 만든 전시
전업 작가들은 초심으로 되돌아가고
일반인들은 내 일상에서 예술 찾는 기쁨을…
전시관 입구에 마련된 세부 전시 제목과 작가 소개.
전시관 입구에 마련된 세부 전시 제목과 작가 소개.

모든 것은 한 번의 실수로 우연히 시작됐다. 직접 찍은 사진으로 전시회를 열려고 장소 대관까지 마쳤는데, 컴퓨터가 고장 나 2년간 모은 사진을 몽땅 날렸다. 사진은 사라지고 덩그러니 대관 약속만 남았다.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주변에 재주 있는 사람들이 참 많다. ‘없는 건 내 사진뿐이잖아?’ 전시를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싶었다.

사진을 날려버린 주인공은 경기도 파주시에서 서점 ‘발전소책방.5’를 운영하는 이정은씨. 주 활동무대는 파주 문발·교하동이다. 오가며 마주치는 동네 사람들에게 “전시하실래요?” 물었더니 “제가 취미로 사진을 찍는데요”, “저는 그림을 그리는데요” 하며 속속 반응이 왔다. 정은씨의 실수는 파주 곳곳에 삶의 터를 잡고 숨어있던 ‘일상예술가’들의 데뷔무대로 이어졌다. 지난달 8일부터 21일까지 파주시 교하도서관에서 열린 <마을에서 예술하다>전 이야기다.

염수진씨의 전시 ‘피우다·마주하다’와 그를 보고 그린 어린이들의 그림.
염수진씨의 전시 ‘피우다·마주하다’와 그를 보고 그린 어린이들의 그림.

작가는 8명이지만, ‘참여자’는 끝도 없네

‘모으다’, ‘상상하다’, ‘바라보다’ 등을 세부 주제로 열린 이번 전시에 작품을 출품한 작가는 8명. 여기에 기획자가 1명을 포함하면 공식적인 참여자는 모두 9명이다. 그런데 전시장에 와 보면 참여자의 범위가 끝도 없다. 우선, 장소를 대관하고 사진을 잃어버려 판을 깐 이정은 씨를 빼놓고 전시를 말할 수 없다. 또 있다. ‘모으다’는 박진숙씨가 올해 중학교 2학년인 아들 요섭 군이 7살 때부터 그린 곤충 그림을 모아 만든 작품이니, 요섭 군의 이름도 빼놓아선 안 된다.

실제로 전시관을 자세히 둘러보면 전시 참여자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각각의 작품 밑에는 누군가 따라 그린 듯한 그림들이 붙어 있다. 그 비밀은 이렇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며 미술 수업도 진행하는 박진숙씨가 학생들을 전시관으로 데려왔는데, 아이들로 하여금 마음 가는 대로 작품을 따라 그리거나 작품에서 받은 느낌을 표현해 즉석에서 그리도록 했다. 아이들은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며 그림을 그렸는데, 그 모습이 ‘일상에서 예술하다’라는 전시 주제와도 딱 맞았다. 그래서 이후엔 아예 색연필과 종이를 구비해놓고 전시장을 찾는 이들에게 ‘마음껏 그리라’고 권유했다. 전시 마지막날 즈음에는 벽 곳곳이 ‘방문예술가’들의 작품으로 풍성해졌다.

여현미씨의 작품 ‘담다’와 그를 보고 그린 어린이들의 그림.
여현미씨의 작품 ‘담다’와 그를 보고 그린 어린이들의 그림.


일상 속 아름다움 찾아내는 눈만 있다면…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배경도 직업도 모두 다르다. 자수·그림·도예·사진은 물론이고, 어린 아들의 그림을 모은 작품이나 거울을 모티브로 만든 작품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여현미씨(‘담다’, 사진 작품)나 박진숙씨(‘모으다’, 아들 요섭군의 어린 시절 그림을 모아 전시)는 출품작이 온전히 취미의 결과물인 경우지만, 전문가도 있다. 사진작가인 이동일씨(‘상상하다’, 사진 작품)나 화실을 운영 중인 최희수·백초윤씨(‘발견하다’, 그림 작품) 등이 그렇다. 그러나 이들 전문작가들도 “일상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움을 순수한 마음으로 표현하는 기쁨이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아들 요섭군의 어린 시절 작품을 모아 만든 박진숙씨의 전시 ‘모으다’와 그를 보고 그린 어린이들의 그림.
아들 요섭군의 어린 시절 작품을 모아 만든 박진숙씨의 전시 ‘모으다’와 그를 보고 그린 어린이들의 그림.

헤이리에서 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이동일씨는 “업으로 사진을 하다 보니 구도가 어떻느니 빛이 어떻느니 하며 기술적인 것에 집착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사진을 접하던 초심으로 돌아간 느낌”이라며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정말 많이 성장했다”고 거듭 말했다. 색연필, 자수, 휴대전화 사진 등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도구로도 일상을 소중히 마주하는 시선만 갖추고 있다면 충분히 멋진 예술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이야기다.

사진작품을 출품한 여현미씨의 일화는 이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하다. 파란 하늘이 가득 담긴 사진은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데, 집 베란다에서 취미 사진가가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다. “딱 잡아내고 싶은 하늘의 빛과 각도를 잡아내기 위해 베란다 밖으로 몸을 내밀다 거의 떨어질 뻔했다”며 여씨는 활짝 웃는다. 일상 속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열정만큼은 이미 프로다. 이들에게 전문가와 비전문가라는 구분은 이미 의미가 없다. 예술을 업으로 삼는 이는 일상예술로 초심을 선물 받았고, 예술이 업이 아닌 사람은 나의 일상도 예술이 된다는 자부심을 얻었다.

교하도서관 3층에 있는 교하아트플랫폼 입구의 모습. 교하의 수려한 자연 풍광을 보며 사색하거나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의자를 아예 창을 향해 배치했다.
교하도서관 3층에 있는 교하아트플랫폼 입구의 모습. 교하의 수려한 자연 풍광을 보며 사색하거나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의자를 아예 창을 향해 배치했다.


마을에서 예술하다? 마을이라 예술된다!

이정은씨가 사진을 잃어버리면서 우연히 전시회가 마련된 것 같지만, 사실 이들의 인연은 오래 전부터 깊다. 파주시 교하동에 삶의 터를 잡은 이들은 한마디로 “교하라서 가능했다”고 입을 모은다. 파주시 교하동은 파주 출판도시가 가까이 자리잡고 있고 자연이 수려할 뿐 아니라, 곳곳에 공방이나 작업실이 있어 예술적 감성이 왕성하게 드러나는 지역이다. 교하도서관 역시 한몫을 톡톡히 했다. 도서관을 엄숙하고 조용하게 책만 읽는 곳이 아니라 이웃과 소통하고 풍경을 바라보며 몸과 머리를 깨워내는 곳으로 새로 태어나게 만든 것. 도서관 곳곳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사람들은 웃으며 담소를 나눈다. 아예 열람실을 없애고 의자는 풍광을 볼 수 있도록 창을 향해 놓았다. 일상예술가들에게 전시공간을 흔쾌히 내어주고, 아이들이 아예 배를 깔고 누워 그림을 그리도록 지지해 준 것은 교하도서관이 가진 철학 덕분이다.

<마을에서 예술하다>작가들이 모여 전시 뒷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사진은 어릴 적 곤충 그림으로 전시에 참여한 중학교 2학년 안요섭군이 찍었다.
<마을에서 예술하다>작가들이 모여 전시 뒷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사진은 어릴 적 곤충 그림으로 전시에 참여한 중학교 2학년 안요섭군이 찍었다.

이뿐 아니다. 본래 이정은씨가 운영해오던 ‘발전소책방.5’은 마을 사랑방 구실을 해왔다. 이곳을 중심으로 다양한 모임이 만들어졌고, 동네잡지인 ‘디어교하’라는 마을잡지도 펴낸다. 파주에 잠시 여행을 왔다 이곳의 매력에 푹 빠져 일단 화실을 옮기고 이사까지 계획 중인 전시 참여 작가 최희수씨(‘바라보다’, 그림 작품)는 ‘디어교하’를 읽다가 전시에 참여하게 됐다. “이 잡지, 그림이 참 예쁘네요. 저도 그림 그리는데….” 한 마디 던진 것이 인연이 된 것. 전시 기획자 김지하씨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럼 전시 같이하실래요?”하며 초대했다.

<마을에서 예술하다>작가들이 모여 전시 뒷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왼쪽부터 여현미씨(뒷모습), 이정은씨, 이동일씨, 김지하씨, 최희수씨. 안요섭군이 사진을 찍었다.
<마을에서 예술하다>작가들이 모여 전시 뒷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왼쪽부터 여현미씨(뒷모습), 이정은씨, 이동일씨, 김지하씨, 최희수씨. 안요섭군이 사진을 찍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대부분 ‘디어교하’ 제작 혹은 기획에 참여하거나, 희수씨처럼 디어교하를 계기로 이들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김지하씨가 동화작가 박채란씨와 마을에서 일어나는 재미있는 일들을 기록했고, 의외로 많은 사람이 마음을 내어 제작에 힘을 보탰다. 이들은 워크숍, 주민 인터뷰 등 다양한 기획을 하며 ‘디어교하’를 세 권이나 만들어냈고, 올해도 지속할 계획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재미있고 아름다운 일들을 함께 벌이고, 그를 기록하는 ‘디어교하’를 냈을 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전시에 참여할 사람들까지 모였으니, 사진을 잃어버린 것은 작은 우연이었을지언정 모두가 참여하는 전시는 그간 촘촘히 쌓아 올린 인연의 결과임이 분명하다.

안요섭군과 어머니 박진숙씨.
안요섭군과 어머니 박진숙씨.

자녀를 키우고 있는 이동일씨와 박진숙씨도 “교하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어릴 적부터 워낙 숲을 좋아하는 아들 요섭군 때문에 파주로 이사했다는 박씨는 “예전에는 남의 집 가서 민폐 끼치면 안 된다고 아들에게 누누이 말했는데, 지금은 서로 아이들이 여러 집에 가서 밥 얻어먹고, 같이 노는 게 익숙해졌다”며 “아이들을 마을이 같이 키우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이씨도 “오늘은 이 집에서 애들을 거둬서 밥 먹이고 봐주면 다음 주에는 내가 배려하고, 그런식으로 함께 살아간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자수를 잘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가족 전시를 열면 자연스레 함께 구경가며 감성을 나눈다. 일상의 희로애락을 함께 발견하는 이웃들이 있고, 그것을 나누니 그대로 예술이 된 셈이다.

비록 전시는 끝났지만, 이웃과 취미가 있는 일상예술가들의 삶은 계속 이어진다. 아래는 전시된 작품 중 일부다. 일상예술가들의 전시를 살짝 들여다보고, 내 일상에서도 표현하고 싶은 아름다움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서상일씨의 전시 '읽다'
서상일씨의 전시 '읽다'

서상일씨의 전시 '읽다'
서상일씨의 전시 '읽다'

여현미씨의 전시 '담다'
여현미씨의 전시 '담다'

박준범씨의 전시 '마을을 바라보는 나'
박준범씨의 전시 '마을을 바라보는 나'

이동일씨의 전시 '상상하다'
이동일씨의 전시 '상상하다'

백초윤씨의 전시 '발견하다'
백초윤씨의 전시 '발견하다'

파주/글·사진 박선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 연구원 sona@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848106.html#csidx2a5a577beaec7bbad26be715154f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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