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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실은 군복무를 하는 전통이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공주 시절 2차 대전에 참전해 트럭을 몰았다. 그의 둘째 아들인 앤드루 왕자는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해 헬리콥터 조종사가 됐다. 그는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의 포클랜드 전쟁에 참전해 적의 미사일이 날아오는 항공모함에서 다른 병사들과 똑 같이 임무를 수행했다. 왕위 계승서열 3위인 헤리 왕세손은 2008년에 이어 지난해 연말에도 20주간 아프가니스탄 전선에 배치됐고, 전투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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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아프가니스탄 전선에 배속돼 생활한 영국 헤리 왕자. AP/연합)

 

<BBC>는 이 나라의 공영방송이다. <BBC>가 공정성을 중시하는 일화 중에 포클랜드 전쟁보도가 있다. 해상작전에서 승리를 거둔 영국은 5천명의 병력과 전폭기를 동원해 상륙전에 나섰다. 이 때 <BBC>는 ‘우리나라’ 가 아닌 ‘영국군’ 이란 표현을 쓰며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전과를 같은 비율로 보도했다. 대처 총리가 격노해 “포클랜드에 자식을 보낸 영국 어머니의 눈물을 생각하라”고 퍼부었다. <BBC>의 답변은 “지금 아르헨티나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였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256명, 아르헨티나군은 712명이 전사했다. (김선주,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中 ). 자국의 전쟁에서 언론이 애국주의의 유혹과 권력의 압력을 뿌리치고 당당히 시비를 가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국은 단두대의 공포가 횡행했던 다른 유럽국가와 달리 비교적 피를 적게 흘리고 민주정으로 이행한 나라다. 논란은 있지만 아직도 절반 이상의 국민이 왕실의 유지를 지지한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나라의 지도층과 언론, 사법부, 입법부 등 핵심 제도들이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자원을 계속해서 생산해 내기 때문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왕자가 전투에 참여하는 것은 내키지 않으면서 하는 연출일 수 있다. <BBC>의 보도 태도 역시 글로벌 전략에 따른 ‘신화 만들기’ 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 사회에 안개처럼 믿음의 기운이 충만해 오른다는 것을 영국의 지도층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로버트 푸트넘이 ‘사회적 자본’ 이라고 이름붙인 신뢰는 사회가 소리 없이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이자 시민들의 마음을 이어주는 접착제이다. 신뢰가 있는 사회는 믿지 못해 확인해야 하는 비용(거래비용), 서로 미워하다 최선이 아니라 가장 덜 나쁜 것을 택하고야 마는 비용(갈등비용) 이 줄어들어 경제성장도 촉진된다. 한 사회의 기득권자인 보수는 전통적으로 이런 신뢰와 통합을 앞장서서 생산해 내는 사회계층이다. 사회를 이렇게 물 흐르듯 관리하면서 계속 지위를 누리고 존경도 받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지도층과 핵심 제도에 속한 기관들은 있는 신뢰마저 까먹는데 선수들이다. 인사청문회 마다 나오는 병역기피, 위장전입, 논문 표절 등은 이젠 장,차관, 국회의원의 ‘기본 사양’이 됐다. 경찰은 ‘짭새’, 검사는 ‘검새’라는 비아냥을 들은 지 오래다. 논문에 매달린 대다수 교수는 사회와 절연이 됐다. “신문, 방송에 났더라.” 하면 논란이 정리되는 때도 있었지만 옛날 추억이다. 이러니 무슨 일만 생기면 일단 확성기 들고 머리띠를 매고 나온다. 한국은 갈등 비용이 아주 높은 나라가 됐다.

 

그래서 지금의 채동욱 검찰총장 사태가 안타깝다. 채동욱은 ‘오리지널’ 보수였을 것이다. 30년 검사 생활에 대한민국 검찰총장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런 채동욱이 ‘찍혀 나가는’ 것은 오히려 보수의 위기이다. “어쩌다 검찰을 응원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는 한탄이 왜 나오겠는가? 좋건 싫건 나라를 맡아서 끌고 가는 중추인 보수의 ‘퇴행’으로 국민들 머리에 검은 구름이 드리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채동욱 총장은 ‘섹스 파티’, ‘거액 수뢰’ 등 잇단 스캔들로 문 닫을 처지에 몰린 검찰이 살기 위해 불가피하게 택한 카드였다. 그는 현 정권 탄생과 탯줄이 엉켜있는 국정원 댓글 사건을 법대로 수사해 기소했다. 3개 정권이 눈치 보며 시늉만 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추징금을 일사천리로 수사해 모조리 받아냈다.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겠다”며 동반사퇴 의사를 밝힌 김윤상 대검 감찰과장의 글로 미루어 채 총장은 검찰 내부의 기강확립 작업도 진행 중이었던 것 같다. 안팎으로 ‘파사현정’ (破邪顯正: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냄) 의 검찰을 보는가 보다 하고 국민들이 모로 꼬았던 고개를 살짝 돌릴 즈음 그의 ‘혼외자식’ 보도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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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3월 채동욱 신임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근혜 대통령은 채동욱 총장의 검찰이 국정원 댓글 사건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한 것이 아프고 불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참았어야 했다. 그게 박 대통령도 홀가분해지고 나라도 사는 길이었다. 살아있는 권력, 그것도 갓 출범한 권력을 건드린 검찰이 누구의 눈치를 보겠는가? 그런 검찰이 야당의 잘못 역시 법대로 처리하면 뻣뻣이 고개 들고 저항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채동욱의 검찰이 무서웠고 기대가 됐던 것이다. ‘삼밭에 자라는 쑥은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게 자란다’는 고사성어(麻中之蓬)가 있듯 사회의 주요 제도 중 한 곳만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 다른 곳들도 맑아진다. 그렇게 우리 사회의 신뢰도가 높아질 기회였던 것이다.

 

서구의 보수는 지배세력으로 남기 위해 사회를 자꾸 통합하는 쪽으로 끊임없이 유도한다. 반면 한국의 보수를 자임하는 세력은 스스로 분열의 씨앗을 퍼뜨리고 있다. 지금 이기는 것 같지만 사실 보수는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합리적 보수의 목소리가 실종된 것이다. 남경필, 원희룡, 정태근, 김성식 등은 그간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에서 야당 역할을 잘 해 냈다. 지금 같은 때 객관적인 목소리를 내면 입지도 넓어지고 신망도 생길 것인데, 세상을 시끄럽게 휘젓고 있는 것은 이름도 고색창연한 ‘육법당 올드보이’들 뿐이다.

 

곡절이야 어쨌든 진보는 두 번의 통진당 사태를 겪으며 주사파 NL과 선을 그었다. 합리적 보수도 화석이 된 보수와 선을 그어야 하지 않을까?

 

이봉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경제커뮤니케이션 박사)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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