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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영국 사회는 정치·경제적으로 새로운 변화와 위기에 직면해 있다. 경제적으로 2010년 현재, 영국 정부의 재정적자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62% 수준에 이르고, 실업자 수는 250만명이 넘는다. 전체 경제인구의 8%가 실업 상태이다.
보수당 정부가 선택한 ‘큰 사회’
정치적으로는 2010년 정권교체가 있었다. 보수당과 자유민주당 연립정부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재정지출을 대폭 삭감하는 대신, 세금을 올리고 있다. 동시에 민간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전략과 비전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시기다.
이러한 변화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보수당 정부가 선택한 것이 있다. 바로 협동조합(co-operative)이다. 최근 영국 보수당 연립정부는 ‘큰 사회’(Big Society)를 전면에 내세워 공공서비스 영역을 협동조합 원리로 해결하려고 한다. ‘큰 사회’는 일반 시민과 지역사회가 중앙정부로부터 권력을 가져와 더 큰 세력을 만들고, 시민 개인과 지역사회 문제, 주택과 학교교육 등의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역량을 갖추는 사회를 가리킨다. 그 중심엔 시민의 협동 원리가 있다. 공공서비스를 협동조합 방식의 서비스로 대체하겠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노동당 정부가 사회적기업 등을 동원해 추진했던 사회서비스 정책을 보수당 연립정부는 160년 전 영국 산업혁명 시기에 사회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등장했던 협동조합이라는 오래된 아이디어를 동원해 실천하려는 셈이다. 소비자와 노동자의 자조·자립이야말로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19세기 산업혁명 와중에 시작
협동조합을 간단히 정의하면 조합원이 소유하고, 조합원을 위해 일하고, 조합원은 동등한 권리를 갖고, 이익은 조합원들이 나누어 갖는 조직을 뜻한다. 따라서 협동조합의 가치는 민주, 평등, 자조, 책임, 공정, 연대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영국 협동조합은 19세기 산업혁명의 파고 속에서 영국 북서부에서 시작했다. 1844년 영국 맨체스터 북쪽에 있는 로치데일에서 출발한 영국 소비자협동조합은 지금까지도 영국 협동조합의 역사를 대변한다. 이러한 역사적 뿌리를 기반으로 발전한 영국의 가장 큰 협동조합 코오퍼러티브 그룹(The Co-operative Group)과 영국협동조합연합회(Co-operatives UK)도 맨체스터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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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협동조합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협동조합보다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협동조합기업’이란 용어가 이를 잘 보여준다. 한국에서 사회적기업이란 용어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만, 협동조합에 기업이란 용어를 붙이는 것은 생소하다. 협동조합기업과 사회적기업의 차이는 분명하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이 소유하는 사업체이며, 사회적기업과 달리 이미 1800년대부터 협동조합이 추구하는 가치가 세계적으로 공유되고 있었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에서 정의한 일곱 가지 원칙이 그것이다.
“인간중심 비즈니스가 특징”
이에 대해 협동조합의 역사와 전세계 다양한 협동조합을 연구해 온 스털링대학의 존스턴 버철 교수는 “협동조합은 일반 영리기업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적기업과도 명백히 다르다. 협동조합과 같이 조합원이 소유한 다양한 사업체(Member-Owned Businesses)는 투자자(주주)가 소유한 기업과 달리, 인간중심 비즈니스가 특징”이라고 그 차이점을 강조했다.
금융위기에도 두자릿수 성장
오늘날 영국 협동조합은 비영리단체로만이 아니라, 중요한 경제주체인 기업처럼 다양성을 갖고 진화하는 과정에 있다. 영국협동조합연합회의 2010년도 보고서를 보면, 2010년 현재 영국에는 모두 4992개의 협동조합기업이 있다. 이 기업에 소속된 조합원은 1290만명에 이른다. 매출 규모는 335억파운드(60조원)이며, 종업원 수는 23만7800명 안팎이다. 협동조합기업의 규모는 영국 전체 유통업체 가운데 5위의 규모를 자랑하는 코오퍼러티브 그룹부터 중소규모 협동조합까지 매우 다양하다. 영국의 유명 백화점인 존 루이스(John Lewis Partnership PLC)처럼 종업원 소유 주식회사도 협동조합기업에 포함된다. 업종 면에서도 유통, 금융 서비스부터 농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협동조합기업들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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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영국 협동조합기업들이 성장하고 있는 원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첫째, 새로운 유형의 협동조합이 지속적으로 출현하고 있다. 학교와 같은 공공서비스에서, 그리고 디자인이나 예술 같은 창조산업에서의 창조협동조합이 등장하고, 대체에너지를 제공하는 협동조합도 나오고 있다.
둘째, 역사적으로 보면 협동조합은 최저임금, 공정무역, 윤리적 소비 등 혁신적 시도를 활발히 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혁신을 나중에 영리기업들이 적극 차용하고 활용하면서 협동조합의 가치가 사회 전체의 변화를 선도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셋째, 협동조합 스스로 지속적인 혁신을 꾀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인수합병을 통해 적극적인 성장 경로를 찾아내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2009년에만 하더라도 코오퍼러티브 그룹이 경쟁 소매유통업체인 소머필드와 금융기관 브리타니아를 인수했다.
영국 협동조합의 사례는 한국 협동조합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먼저, 지배구조가 민주적이라는 점이다. 영국 협동조합의 지배구조는 조합원을 중심으로 한 민주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는 협동조합기업의 연합체, 즉 그룹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협동조합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코오퍼러티브 그룹에서 개인 조합원은 지역위원회의 대표를 뽑고, 지역위원회에서는 지방권역 이사회 대표를 선출하고, 그들이 전국 이사회의 이사를 선출하는 방식이다.
다음으로, 협동조합에 대한 법적 규제가 적은 편이라는 점이다. 즉, 영국에는 협동조합만을 특별히 규율하는 법률이 따로 없다. 법적 규제가 적기 때문에 협동조합도 일반 기업체처럼 유통, 금융, 여행, 장례, 자동차 판매, 토지 개발, 농업 등 다양한 사업체를 운영할 수 있다. 이러한 민주적 지배구조와 다양한 사업체를 가진 협동조합이 영국 협동조합의 밝은 미래를 담보할 것으로 보인다.
글·사진 장승권 성공회대 경영학부·대학원 협동조합경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