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착한경제] 기업에 혁명이 필요할 때

HERI 2014. 11. 12
조회수 6106

등록: 2011.02.24 수정: 2014.11.12


미국 유학 시절, 기숙사 근처의 친환경 유기농 마트 ‘홀푸드마켓’(Whole Foods Market)은 아내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터였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쌓여 있는 색색의 유기농 채소와 과일들, 진열대에 가득 찬 유기농 치즈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향긋한 냄새, 그리고 ‘365’브랜드가 붙어 있는 와인까지. 게다가 진열대에 놓여 있는 샐러드 드레싱이며 어린이 쿠키에는 ‘수익금의 몇 퍼센트는 환경과 어린이를 돕는 데 사용됩니다'라고 쓰여 있기 일쑤였다. 계산대 옆에는 인권이나 저개발국 빈곤 퇴치에 기부하자는 구호와 함께 팜플렛이나 동전함이 놓여 있기 마련이었다.


그 곳에 가면 우리는 기분이 좋아졌다. 가난한 유학생의 주머니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서 들고 나오는 장바구니가 그리 무거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홀푸드마켓은 방문하는 것 만으로도 즐거워지는, 그리고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착해진 기분이 드는, 그런 곳이었다. 주말 오후의 쇼핑에서 값싼 점포브랜드(PB) 와인 한 병과 치즈 한 조각만 사더라도, 저녁이면 그 와인을 따르면서 그 날의 쇼핑을 회고하며 지구의 미래에 대해 멋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마트였다.


세븐스 제너레이션(Seventh Generation)은, 우리가 그 홀푸드마켓의 진열대에서 발견한 보물같은 세제 브랜드였다. 초록색 숲이 포장 전면에 가득한 모양부터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세븐스 제너레이션은  지구를 생각하고 사회적 책임을 고려하는 기업'이라는, 그 포장에 쓰여 있는 문구까지. 한 마디로 우리에겐 매력투성이인 브랜드였다. 나는 한참을 진열대 앞에 서서, 그 제품을 들고 포장을 찬찬히 뜯어보곤 했다.


<책임 혁명>을 펴서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저자 제프리 홀렌더의 이름이었다. 그는 세븐스 제너레이션의 공동 설립자 겸 회장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던 시기부터 ‘사회책임기업’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사회적 사명을 실천하겠다고 나선 기업의 설립자다.


설립 때부터 세븐스 제너레이션은 온갖 비웃음을 사면서 표백하지 않은 재생 폐휴지로 티슈를 만들어 팔면서, 소비자들에게 솔직하게 그 사실을 알렸다. 자신들이 파는 제품을 스스로 비판하고, 최고경영진 연봉 총액이 비간부 전체 직원 연봉의 14배를 넘지 못하게 스스로 제한했다.제품 광고 대신, 통신판매 카탈로그 표지에 진보적 정치인인 빌 클린턴과 앨 고어 얼굴을 넣어 공개 지지를 하기도 했다. 이 회사는 기업보다는 활동가에 가까웠다. 그게 벌써 20년 전이었다. 그 때 제프리 홀렌더는 선지자이면서 선지자였다.


그리고 CSR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르고 입에 오르내리는 지금도 여전히, 그는 선지자이면서 선도자다. 대기업들이 이익의 1%를 사회에 내놓는다고 젠체하며 1%클럽을 만들고 있을 때, 세븐스 제너레이션은 이익의 10%를 비영리기관에 기부하는 파격적 원칙을 견지하고 있다. 다른 기업들이 ‘소비자의 욕구’를 찾아 만족시켜줘야 한다며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을 때, 세븐스 제너레이션은 ‘소비자가 의식을 갖고 소비할 수 있도록 교육시켜 변화시키겠다’는 대담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한다.


이 책, <책임혁명>은 그 정점에 서 있다. 그는 이제 혁명을 말한다. 정치권력을 민주적으로 바꾸는 정치혁명이 아니다. 구세대의 악습을 없애자는 문화혁명도 아니다. 바로 그가 서 있는 땅, 기업이라는 곳에서 일어날 혁명을 이야기한다.


그의 혁명 선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는 더 이상 기업 책임과 관련해 그 동안 해온 식으로 점진적 개선, 미세조정, 안이한 업그레이드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점진적인 접근을 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너무 많은 기업들이 말로는 기업 책임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자기들이 하는 활동이 사회에 손상을 주고 환경을 훼손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 중요한 것은 그저 주가 상승과 경영진의 자리 보존 뿐이었다. 소수의 이익이 다수의 복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우리는 그런 낡은 정신 모델이 조만간 바뀔 것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많은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말한다. 대기업 경영자들은 명절이면 달동네에 가서 연탄을 나르거나 보육시설을 방문해 아이들을 안아주고는 사진을 찍어 보도자료와 함께 배포한다. 현란한 명칭의 관련 협정과 국제기구에도 점점 더 많이 가입한다. 회사의 환경, 인권, 노동, 지역사회 공헌, 제품 책임 등을 명시한 CSR보고서도 점점 더 많이 내놓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어딘가 허전하다. 이걸로 충분한 걸까?


여기에 단호하게 ‘No’라고 말하는 게 바로 이 책이다. 기업의 책임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명이다.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느냐다.


인류가 기후변화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저개발국에 빈곤이 사라지게 하는 데, 소비자가 환경과 사회에 이익이 되는 제품을 더 많이 소비하고 그렇지 않은 제품을 사지 않도록 이끄는 데, 그 사명이 있어야만 진정한 사회책임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게 없다면, 다른 것은 가식일 뿐이다.


제프리 홀렌더는 그래도 변화의 싹을 본다. 자신만을 위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지향하는 세븐스 제너레이션 같은 기업도 있다. 단기 재무성과 대신 지속가능한 가치를 추구하는 막스&스펜서 같은 기업도 있다. 정직과 투명성을 앞세우는 ‘파타고니아’ 같은 기업도 있다. 인권 스캔들을 겪고는 반성하면서, 구성원 전체가 세상의 지속가능성을 생각하는 기업으로 변모한 나이키 같은 기업도 있다.


기업의 의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게 변화다. 그래서 지금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기업의 사회의식을 질문해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한다.


40년 전, 한국 기업은 정부를 계획에 맞추기 위해 경영되어야 했다. 20년 전, 한국 기업은 오너 일가의 이익을 위해 경영되어야 했다. 지금, 한국 기업은 주주 이익을 위해 경영되고 있다. 20년 뒤 한국 기업은, 무엇을 위해 경영되어야 할까?


단 한 가지 질문. 당신은 무엇을 위해 기업을 경영하는가? 그 대답이 혁명을 맞고 있다. ‘책임 혁명’은 바로 그런 혁명이다. 20년 뒤에도 성공적인 기업을 만들고 싶다면, 그 혁명의 내용인,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몰라서는 곤란하다.


오늘 밤 와인을 딸 때는, 그 와인이 유기농 와인인지를 먼저 묻자. 모닝 커피를 탈 때는, 이 커피가 공정무역 커피인지를 묻자. 그게 20년을 앞서가는 제프리 홀렌더와 호흡을 맞추기 위한 첫 걸음일 것이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장 www.facebook.com/lee.wonjae.f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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