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10.11.25 수정: 2014.11.12
대학시절, 함께 스터디를 하던 멤버 중에 똑똑하고 모범적인 선배가 있었습니다. 인자하고 현명해서 상담 신청을 하면 마치 자신의 일인냥 정성껏 조언해주곤 했습니다. 머리도 좋아서 공부를 오래 하지도 않았는데, 한 국책은행에 합격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던 선배입니다.
대학 졸업 후에도 종종 만나며 지내던 선배가 작년 여름에 알 수 없는 행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른바 '잠적'을 한 것이죠. "이번 휴가는 집에서 쉬기로 했어"라는 멘트를 마지막으로 이틀간 연락이 두절된 것입니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며칠만에 연락이 닿은 선배의 말이 더 가관이었습니다.
"응. 문명하느라고."
문명! 이것이 무엇인가요. 이것은 게임개발자 시드 마이어가 만든 것으로, 한번 시작하면 30분 정도 한 것 같은데 사실은 3시간이 지나 있는, 이른바 '타임리프'를 경험하게 만든다는 전설의 게임입니다. 하나의 문명을 정해서 발전시켜 나가는 게임인데, 더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폐인 양성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게임이지요.
'문명'하다 진로 찾은 남자
문명이라는 게임에 그렇게나 대단하던 선배도 무너지는구나 하고 놀라던 찰라, 선배는 모를 말을 했습니다. "문명하다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았어" 라고 말이죠. 당시 선배를 알던 저와 친구들은 '이제와서 프로 게이머라고 하겠다는건가'하는 생각에 걱정부터 앞섰습니다.
다행히 선배가 하고 싶은 것은 게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게임 '문명' 속에서 있었던 일들을 직접 현실에서 해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머리 하나는 기똥차게 좋았던 그 선배는, 그 길로 유학을 준비해서 지금 미국 아이비리그의 한 대학에서 개발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그런 선배가 몇달 전, 사회적기업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이 사회적기업 쪽으로도 유명한데 관련 수업을 듣고 싶어서 사전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대뜸 왠 사회적기업이냐고 물었더니, 선배는 황당한 말로 대답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에 문명5가 나와서 해봤는데......."
이야기의 요지는 이거였습니다. 문명5에 손을 댔는데 게임 안에서 말도 안되는 최강국 인도와의 협상에 실패하여 게임이 생각보다 금방 끝나버렸던겁니다.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간디'가 이끄는 게임 속 인도는 가난하지만 국민의 행복 수준이 높아 생산력이 무척 좋아서 다른 문명보다 빠르게 성장하여 세계 각 분야에서 패권을 쥐고 있다는 것이지요.
문득 이런 생각들이 들었답니다.
국제 개발이라는 것, 즉 저개발국가의 경제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사실 그 나라 국민들의 행복과 열정과 의지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결국은 그것을 달성해낼 수 있는 방법론이 정답이지 않을까?
또다시 문명을 하다가 자신의 길을 찾은 선배는, 아래로부터의 개발에 대한 이런저런 자료를 찾다가 어떤 컬럼에서 사회적기업 모델이 최하층의 삶을 개선하는데 효과적인 모델이라는 표현을 보고 '사회적기업'을 키워드로 삼게 된 모양인듯 했습니다.
비록 게임을 하다가 다다른 결론이지만, 선배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사회적기업 모델이 국제개발과 원조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지속가능하게 하는 방법론이 될 수 있다는 견해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기업 모델은 기본적으로 그 사회가 지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업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회 내에서 지속적으로 자생하는 것을 목표로 하므로, 원조나 국제 개발의 방법론 중 하나로 사회적기업을 도입하여 어느 정도 단계에 접어들면 더이상의 투자가 없어도 문제 해결은 지속될 수 있다는 점에서 효과적입니다. 게다가 개발의 대상이 되는 국가의 국민들에게 사회적기업가 정신을 전파하게 되면, 그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개발과 성장의 속도를 촉진시킬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사회적기업 모델의 효과는, 예컨대, 같은 돈 100억이어도 그냥 일반적인 자금 원조로 쓰는 것과 그 나라에서 저소득층의 창업 등을 위한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을 운영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면 쉽지요.
선배는 게임 속에서의 강대국들이 강력한 군주를 가진 문명이 아니라 국민들의 행복 수준이 높은 문명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지만, 사실은 자신도 모르게 일방적인 계획에 따라 자원을 투입하는 '하향식' 개발이 아니라 국민의 의지와 이해관계자들의 파트너십 속에서 완성되는 '상향식' 개발이 가진 가능성을 인식하게 된 셈입니다.
당신에게, 이 분을 소개합니다!
저는 이런 선배에게 일본의 히토츠바시대학에 계신 다니모토 간지 교수님의 페이퍼를 잔뜩 추천해 주었습니다. 교수님은 최근 사회적기업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혁신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실제로 그런 케이스는 무엇인지 등에 대한 연구 페이퍼를 여러번 세상에 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다니모토 간지 교수님은, 연구소 안에서 CSR과 사회적기업 모두에 호기심을 갖는 저에겐 은인 같은 분이십니다. 보통 CSR 전문가와 사회적기업 전문가가 나뉘기 마련인데요, 그런데 저는 양 쪽 모두에 고개를 들이밀려다 보니 내가 틀렸나 싶기도 하고 이러다 어느 쪽으로도 전문성가가 되기 어려운건 아닌가 싶어 자꾸 고민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다니모토 간지 교수님은 CSR 연구를 오래 하신 분이면서도 사회적 혁신을 이야기하면서 사회적기업 모델과 사회적기업가 정신을 강조하는 분입니다. 두 영역을 넘나드는 셈인데, 그래서 그런지 아직 한번도 뵌 적은 없지만 그 분의 페이퍼는 언제나 저에게 '넌 잘하고 있어. 관심 있으면 너무 구분 짓지 말고 공부해보렴'하고 조언해주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답니다.
CSR과 사회적 기업을 연결하는 다니모토 간지 교수님의 키워드는 '이해관계자'인 것으로 보입니다. CSR에서는 이해관계자와의 관계 설정을 통한 전략적 접근을 중요하게 설명하고 있고,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사회적기업을 중심에 두고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연결된 Social Innovation Cluster가 필요하다고 설명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분을 한겨레신문사가 주최하는 아시아미래포럼을 통해 뵐 수 있게 되었으니, 저에게 만큼은 기가 막힌 행운입니다. 돈 내고 라도 찾아뵐 판에 HERI에서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포럼을 휘젓고 다니며 뵐 수 있게 되었으니, HERI에서 일하기로 한 선택이 새삼스레 뿌듯할 정도에요. 저때문에 이제는 다니모토 간지 교수님의 팬이 되어버린 그 선배도, 아시아미래포럼 기간 동안 자신이 미국에 있어야 함을 억울해했지요. (그래서 맘껏 약올려주었어요.)
(이만큼 흥분해 놓고 이제 와서 이런 말하는건 좀 웃기지만) 사실 다니모토 간지 교수님이 아니더라도, 아시아미래포럼에서의 사회적기업 세션은 기대가 됩니다. 동아시아의 사회적기업 모델에 대해 이야기하고, 한국형 모델을 다른 나라나 해외 원조에 활용할 수 있을지 논하는 자리인 만큼, 우리나라의 사회적기업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논의가 이루어질테니 말입니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듭니다. 문명5 보면 간혹 간디가 "공정무역은 모두에게 이익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하면서 자신이 이끄는 인도가 초강대국이면서도 저개발 문명의 발전을 위해 공정무역을 제안하거든요. 이런 설정들을 보면 아시아미래포럼에 시드 마이어(문명 개발자)를 초청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말이지요.
물론 시드 마이어는 오지 않더라도, 다니모토 간지 교수님이 오실테니 여전히 두근두근 기다려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죠:)
* 아시아미래포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http://www.asiafutureforum.org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김지예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