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10.06.09 수정: 2014.11.10
경제학은 과학(science)일까 인문학(art)일까?
한 마디의 경제학 명제 뒤에 드리워져 있는 현란한 숫자의 향연을 들여다보면 분명 과학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경제학자들 중 상당수는 그 수많은 숫자들이 보여주는 엄청나게 많은 상반된 결과들 사이에서 방향을 잃고 방황하곤 한다. 반면 경제학의 대가들은 숫자가 정해주는 방향에 흔들리지 않고 직관과 통찰을 무기 삼아 홀연히 미래를 예측해 내기도 한다. 이런 광경을 보면 경제학은 분명 인문학인 것 같기도 하다.
2004년, 오프쇼어링(해외 아웃소싱)을 놓고 미국 수도 워싱턴DC에서 백악관의 경제학자 그레고리 맨큐(<맨큐의 경제학> 저자)와 정치인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보면서 역시 경제학은 인문학에 가까운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과학과 실질을 숭상한다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도 그랬다. 특히나 상아탑에서 벗어나 정책의 현장으로 가면 더욱 그렇다.
스탠리 피셔 시티그룹 부회장은 강연 중에, 맨큐가 자신의 심정을 담아 보낸 이메일을 언급하면서 이런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레고리 맨큐의 이메일
“그레고리 맨큐가 얼마 전 이메일을 보냈더군요. ‘오프쇼어링(일자리 해외 아웃소싱)이 장기적으로 미국 경제에 이롭다’는 발언 뒤, 자신이 수천명에 불과한 경제학자들의 맨 앞 줄에 서서 성난 3억의 미국인들과 싸움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요.” 강연차 MIT슬론을 찾아온 스탠리 피셔 시티그룹 부회장은 이런 말을 전했다.
그레고리 맨큐는 미국 부시 행정부의 백악관 경제자문회의 의장이었다.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이며,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맨큐의 경제학’의 저자이기도 하다. 유명한 경제학자이면서 동시에 한국으로 치면 청와대 경제수석 쯤 되는 자리에 앉아 있는 셈이다.
맨큐가 미국 대선 정국의 최전선에 등장하게 된 건 경기회복에도 일자리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터져 나온 그의 ‘일자리 수출’ 발언 때문이다. 맨큐는 대통령 경제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오프쇼어링 옹호 발언을 내놓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재화가 무역을 통해 국경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이동할 때 모두에게 최대의 가치가 창출되는 것처럼, 노동도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할 때 최대의 가치가 나온다’는 경제학 원론에 나올 법한 문장을 그대로 읊었다.
맨큐의 발언은 미국 정치인들에게서 바로 십자포화를 맞았다.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공화당 의원들조차 공격에 가세했다. 의원들은 ‘부시 행정부가 미국인의 일자리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라며 맹공을 퍼부었다. 레이건 행정부 시절 재무부 차관보까지 지내며 공화당 핵심 경제 브레인 중 한 명으로 꼽혔던 폴 로버츠 교수는 최근 브루킹스연구소 세미나에서 “오프쇼어링으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등 고임금 직종들이 인도 등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미국은 20년 뒤 제3세계 국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아웃소싱, 블루칼라에서 화이트칼라로
전통적으로 제조업 공장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민주당이야 당연히 그렇다지만, 화이트 칼라와 부유층의 지지를 받는 공화당까지 왜 비판에 나섰을까. 오프쇼어링이 그만큼 파괴적으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전의 제조업 아웃소싱이 전통적 민주당 지지자들의 문제였다면, 서비스를 중심으로 한 최근의 오프쇼어링은 차차 공화당 지지층인 고소득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다.
오프쇼어링 수업 시간에 외부 강사로 초청된 매사추세츠종합병원의 산제이 박사는 의료부문 오프쇼어링의 선구자쯤 된다. 그가 설명한 의료 오프쇼어링 내용은 이렇다. 보스톤에 있는 매사추세츠종합병원에 가서 X레이나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을 받는다고 치자. 촬영한 디지털 사진은 바로 태평양을 건너 인도로 전송된다. 인도에 있는 영상의학과 의사들이 아침에 출근하면, 매사추세츠종합병원에서 촬영한 방사선 사진들이 파일로 전송되어 있다. 판독을 시작해 하루치 일을 모두 끝내고 전송하면, 매사추세츠에서는 바로 다음날 아침이다. 환자는 보통은 꼬박 며칠을 기다려야 알 수 있던 방사선 촬영 결과를 바로 다음날이면 알 수 있다. 물론 인도 영상의학과 의사가 판독한 결과다.
인도 영상의학과 의사의 임금은 미국 영상의학과 의사의 2분의 1에서 3분의 1 가량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오프쇼어링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니다. 환자가 좀 더 빨리 결과를 알 수 있고, 의료진이 좀 더 빨리 필요한 조처를 취할 수 있게 된다. 여기다 인도의 영상의학과 의사는 최고의 소득을 얻는 직종 가운데 하나라 나라의 최고 엘리트들이 모여든다. 의료의 질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물론 미국의 일자리는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미국 영상의학과 의사의 연봉은 평균 15만 달러(1억5천만원) 수준을 넘나든다. 이 정도면 웬만한 화이트칼라 평균소득을 훌쩍 뛰어넘는 고소득층이다. 그러니 제조업의 3D 업종을 중국 공장으로 보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다. 공화당 의원들도 흥분할 수 밖에 없는 주제가 된 것이다.
2004년 포레스터리서치는 앞으로 8년 동안 일자리 47만 3천개가 오프쇼어링으로 해외로 이전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이전되는 일자리를 연봉으로 따지면 총 1360억 달러(136조원)에 이른다. 물론 평생 열심히 해온 일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하는 사람이 겪는 정신적 어려움은 잃어버린 연봉보다 훨씬 크다. 오프쇼어링을 옹호하는 맥킨지조차 실업의 고통은 경제적 비용보다 크다고 지적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갈등
하지만 대부분 주류 경제학자들은 오프쇼어링을 여전히 옹호한다. 노동비용이 낮아지면 기업의 생산성은 높아진다. 미국 기업들의 생산성이 높아질수록 미국 기업들의 경쟁력은 강해진다. 경쟁력 강화는 결국 소득 증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20세기 동안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나라들 사이의 빈부 격차는 커졌지만, 결과적으로 문을 닫아건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소득이 감소한 나라는 없다는 점을 증거로 내세운다. 미국 건국 이후 가난한 주와 부자 주 사이의 소득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지만, 양쪽 다 더욱 소득이 높아졌다는 사례도 자주 제시된다.
다국적 컨설팅회사 액센츄어는 오프쇼어링 결과 미국 노동자들은 밸류 체인에서 높은 수준에 있는 업무에 집중하고 제3세계 노동자들은 그 아래 수준의 업무에 집중하면서 생산성 증가분을 나눠 갖게 된다며 ‘윈-윈’전략이라고 격찬했다.
그러나 여전히 의구심은 남는다. 자유무역과 마찬가지로 오프쇼어링이 나눠먹을 파이 전체의 크기를 늘리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파이가 어떻게 나누어 질 지에 대해 경제학은 이야기하지 못한다. 양질의 일자리가 수출되면서, 당장은 평균적인 미국 노동자의 임금이 낮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냉전 시기 세계질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긴장으로 정의됐다. 지금 세계질서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긴장으로 정의된다. 자본주의의 심장 미국에서 오프쇼어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외형적으로는 ‘정치와 경제의 갈등’이기도 하고 ‘엘리트 과학과 포퓰리즘의 갈등’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오랜 기간 물밑에 머물러 있던 미국 자본주의와 미국 민주주의의 갈등이 모처럼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 졸저 'MIT MBA 강의노트'를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 '단행본 공개 프로젝트' 의 일환입니다.